전날의 섬들

세상을 재미있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두꺼비네 맹꽁이 2002. 12. 28. 04:15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고는 하지. 이 세상은 왜 이렇
게도 불행한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는가. 그런데, 그
런 생각을 하다가 곰곰이 안을 들여다보면 또 쓴웃음
이 나오곤 해. 스스로 불행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정
말로 불행한 것일까, 아니 그보다도 그들이 과연 불행
이 무엇인 줄을 알기나 하는 사람들일까, 하는 의문
이 생겨서 말야.

며칠 전에 본 텔레비전 뉴스가 오늘 다시 떠올랐어.
아니, 오늘뿐만 아니라 어제도 그렇고 그제도 그렇고
영 떠나지를 않네. 오랜만에 본 텔레비전 뉴스였는
데, 씁쓸하고도 서글프게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끼여 있었더랬어. 23살 여자가 호스트바를 드나들다
가 남자 종업원들에게 살해되어 암매장당했었다는 이
야기야.

알아. 사람이 죽었는데 어떤 식으로든 재미있다고 말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거, 그런데 그게 또 그렇잖
아. 재미라는 게 무슨 꼭 웃어야 할 일만 가리키는
건 아니잖아.

그래. 내 경우에 재미는 세상의 이런저런 것들을 다
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것들을 말해. 나를 웃
겨주는 것은, 그것은 단순한 코미디일뿐 재미는 아니
라는 거지. 코미디도 재미의 일종이라고? 글쎄,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이 좀 궁해지기는 하지만, 그래
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코미디는 내 영혼을 건
드리지는 못한다고. 코미디는 다만 내 육체의 아드레
날린을 분비시켜 정신을 잠깐 상쾌하게 해줄 뿐이라
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

맞아. 내 영혼은 그날 그 텔레비전 뉴스를 본 이후
로 계속 충격 상태야. 충격이란 뭐야.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 내가 새로운 자각
을 하게 되었다는 거잖아. 요컨대 눈이 하나 새로 생
겼거나 기왕에 있었던 눈이 전보다 깊어지고 넓어졌다
는 말이지.

스물세살 여자의 호스티바 출입. 그 여자의 집에까
지 찾아가서 같이 노는 척하다가 여자를 살해하고 진
주목걸이니 반지니 패물을 빼앗고 신용카드인가 뭔가
하여튼 카드도 빼앗아서 삼천몇백 만원인가를 인출해
서 빚도 갚고 자동차도 새로 사고 진탕만탕 싸돌아다
니다가 잡힌 종업원들, 이 사건의 뿌리를 더듬어 찾아
보느라고 내 영혼은 앉으나 서나 요새 계속 분주한 거
야.

예전에 호스티바는 바람둥이 남편을 둔 <사모님>들이
나 여기자, 여의사, 여형사 또는 술집 아가씨 등등 남
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여성들이 주로 드나들었
다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게 아닌가봐. 이십대 초반부
터 그런 곳을 드나들어야 할 정도로 우리의 사회는 그
렇게도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고 무료하고 지루하고
아무런 충격도 없는 무미한 세상이 되어버렸나봐.

호스티바는 남자들이 드나드는 룸살롱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구조적으로 허가를 받을 수 없는 불법영업이
기 때문에 비용도 곱으로 든다고 하는데 말야. 가령
룸살롱에서 남자 한 사람이 하룻밤 놀고 백만원을 쓴
다면 여자는 이백을 써야만 하게 되어 있는 것이 호스
티바라는 것인데 말야. 어떤 유비통신에 따르면 여자
들끼리 호스티바 가는 계를 하기도 한다고는 하지만
피살당한 그 여자는 계를 묻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혼
자서 사나흘에 한 번씩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말야.
그 많은 비용을 어떻게 충당해 왔는가도 의문이지만
스물세 살 여자가 그런 곳이 아니고는 자신의 존재사
실을 증명받지 못할 정도로까지 폐쇄되어 버린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나는 끔찍한 거야.

요컨대 나는 지금 섹스산업 자체를 문제삼자는 게 아
니라는 거야. 여자들이 이제 바야흐로 남자들의 일탈
된 성문화를 모방하고 있다는 식의 한갓진 얘기나 하
자는 것도 아니야. 생각건대 섹스산업은 비난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양성화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있
으면서도 없는 척, 아닌 척하는 데서 범죄는 발생하
는 것이니까. 하지만 오늘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섹스라는 특정 산업이 아니고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시스템에 관한 것이니까 이 얘기는 이쯤에서 접어야겠
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인주의를 다소 회의하는 편이기
는 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겠
어. 개인주의는 개인주의 나름의 장점을 분명히 갖추
고도 있으니까. 문제는 개인주의가 극단화되었을 때
야. 개인주의란 자본주의의 다른 말 아니겠어? 자본주
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빈부격차의 심화를 낳고 여기
에서 온갖 사회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란 말이거든.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개인에게 미치는 부작용은 아마
도 세상을 한없이 좁아터진 골방 같은 것으로 파악하
게 한다는 것일 거야. 요컨대 스스로를 소외시켜간다
는 것이지.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어. 개인주의
는 대체적으로 물질적인 풍요가 이루어졌을 때 발생하
는 일종의 공주병 내지는 왕자병 같은 것이란 말이거
든. 나는 다르다 하는 것. 다르게 살고 싶다 하는
것.

이것은 뭐야. 얼핏 보면 개성적인 삶을 희구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개성과는 전혀 무관해. 개성은커녕 오
히려 진부하기 짝이없는 유행병이고 권력욕이라고나
해야 옳을 거야, 아마.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다름
이란 기껏해야 팔십만원짜리 팬티를 입고 백삼십만원
짜리 넥타이핀을 차고 한 병에 수백 만원 하는 양주
를 마시며 너는 예쁘고 말도 잘 들으니까 삼십만원 너
는 못생기고 노래도 잘 못하니까 십만원 하는 식으로
팁이나 뿌리는 것이란 말이거든.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너나없이 밤낮 모르고 불러
댄 노래의 원래 목적이 고작 이런 것은 아니었을 텐
데 말야. 이렇게도 허약한 모습이나 보이자고 잘살기
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야. 그런데 이게
뭐야. 왜 이렇게밖에 못살아야 해?

맞아. 그거야. 다들 너무나 허약해져 버렸다는 느낌
이야. 조금만 불편해도 죽는다고 엄살을 떨고, 엄살
을 떨다가 옆에서 그것을 안 받아주면 그 사람을 나쁘
다고 저주하고, 그러다 보면 자신은 정말로 무슨 피해
자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서는 도대체가 문제라고
볼 수도 없는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가지고 타인에게
시비하기를 마치 취미처럼 하게 되는 그런 이상한 최
면현상에 빠져버렸다는 느낌이야.

사랑만 해도 그래. 그저 사랑, 사랑 말들만 많지 안
을 들여다보면 이게 정말 사랑인지 탐욕인지 헷갈리
는 경우가 너무 많아. 상대에 대한 배려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느낌이야.
잘한 것은 모두가 내 것이고 잘못한 것은 모두가 당
신 것이라는 식의 그런.

왜 이렇게 살아야 해? 왜 이렇게밖에 못 살아야 해?
왜들 이렇게도 좁아터진 새장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스
스로 기어들어가서는 꺼내달라고 외치고 막상 꺼내주
려고 하면 그 사람의 뺨을 후려치는 식의 이런 도착
된 삶을 운영해야만 해?

물질의 풍요가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자본주의의 얼빠
진 애무가 이런 엽기적인 오르가슴을 낳는 것이라면
아아, 나는 이런 넋없는 자본주의가 싫다싫어, 정말이
지 싫다싫다.



아래 그림은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