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

모르는 여인에게(셋)

두꺼비네 맹꽁이 2002. 12. 1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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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동굴속 암벽의 천장에 발을 붙이고 거꾸로 매달린 채로 잠들어 있는 박쥐들의 생태를 카메라로 찍어서 편집한 비디오 화면을 건성으로 쳐다보며 나는 골똘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디서 만났던 것일까. 왜 만나게 되었던 것일까. 하루, 이틀, 사흘 가까이를 나는 그렇게 같은 화면을 반복해서 들여다보며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딴 생각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요. 천장에 발을 붙이고 거꾸로 매달린 채로 잠이 드는 박쥐들의 생태에 대한 호기심이 결코 미약한 것만도 아니건만 십 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그렇게 딴 생각이 찾아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흘 아니라 석 달을 본다 해도 박쥐들의 생태가 마치 나 자신의 삶인 것처럼 내 안으로 들어올 리는 만무한 일이었습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온전하게 본다 해도 최소한 열 번은 봐야할 텐데, 그렇게 본다 해도 그들의 삶 가운데 극히 일부분이나 내 안으로 들어와 줄지 어떨지 알 수가 없는 일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건성으로 박쥐들의 생태를 관찰하면서 당신을 찾아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스무 살 이후의 기억들을 모조리 불러내놓고 탐색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서랍에서 묵은 일기장을 꺼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넘기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것이라고만 여겨왔던 내 생의 기록은 또 어쩌면 그렇게나 많은지요. 기억의 샘은 퍼내도 꺼내도 마르지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스무 살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스물한 살을 지나 스물두 살, 스물아홉 살 때의 일을 더듬고 있노라면 스물한두 살 시절의 새로운 기억이 무더기로 떠올라와서 나를 놀래키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뭐가 이렇게도 많은가, 뭐가 이렇게도 복잡한가. 나는 어쩌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마 한 삼천 년 정도는 살았었나봐, 그랬나봐, 하는 그런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내내 그런 식이었지요. 지나간 일을 더듬고 또 더듬고, 이십여 년 동안의 흔적을 모두 들여다본다는 게 쉬운 아닐 테지만 그러나 그때까지 나타난 그 어떤 갈피에도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만일 고향 후배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정말로 사흘이 아니라 석 달이 넘도록 웅크리고 앉은 채로 기억을 더듬다가 그만 죽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알지도 못하는 여인을, 얼굴의 윤곽조차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다만 하나의 이미지로서만 존재하는 여인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일은, 그런 일은 시작이 어려워서 못하는 것일 뿐, 일단 작심하고 시작을 했다 하면 목마름이 가중되어 여간 빠져 나오기가 어려운 것일 테니 말입니다.

"어이 형, 뭐하냐, 뭐해."

후배는 나를 형이라고 부르면서도 곧잘 하대를 하는 아주 버릇이 제멋대로인 녀석이었지요. 그런데 나는 또 녀석의 그런 제멋대로식 분방함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고요. 그렇다고 그 후배가 세상을 가볍게 여긴다거나 결례를 밥먹듯이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도자기를 가업으로 이어받은 이후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하다가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고는 그만 포기한 전력을 갖고 있을 정도로 일반규범을 존중하는 면도 있는 녀석이니까요.

"우리 애들 홈페이지에다 박쥐 얘기 몇 편 써서 올려달라니까 넨장, 뭐야 이거, 아직 시작도 안 한 거잖아. 뭐야, 뭐하는 거야, 이거, 응?"

후배는 그 무렵에 아내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의 이름을 딴 교육용 홈페이지를 만들어놓고 온갖 곤충들이며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의 특성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그림들을 세부묘사에 도움이 될 수 있게끔 자상하게 정리해서 올려놓는 일종의 <도우미> 일에 새로이 취미를 갖고 그 일에 열성을 바치고 있었지요.

주로 하는 일은 물론 도자기와 관련된 것이었고, 작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미술학원의 스쿨버스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도 아이들을 위한 홈페이지에까지 관심을 갖는, 말하자면 대단히 열성적인 성품을 소유했다고 할 수가 있겠네요. 아무튼 그가 박쥐에 관한 것들을 나한테 써달라고 했던 것인데, 내가 그만 당신에 대한 기억의 복원에 몰두한 나머지 그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 이, 내가 이거 백발이 삼천장이로구나."

나는 일어서서 거울을 쳐다보며 이백의 자세로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때 내 얼굴은 실제로 놀라우리만치 낯설고, 그리고 늙어 있다는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혹시 이해가 되실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겨우 사흘뿐이었는데도 수염이 한 뼘 이상 자라니 있는 것 같았고, 새치라고나 해야 할 흰머리가 몇 개 비칠 뿐이었는데도 머리가 온통 하얗게 새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나를 그토록 낯설고, 늙어 보이게 했던 것일까요. 그런데 그때 후배는 놀라운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찾은 이유는 홈페이지에 올릴 글을 독촉하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이 형, 재작년에 우리 대구로 여행갔을 때 같이 술 마시고 시간을 죽였던 여자 있잖았어, 왜. 어제 밤 꿈에서 그 여자를 봤다, 이게 뭐지? 난 내 아내 말고 다른 여자에게 통 관심이 없었는데 왜 그런 꿈을 꾼 거지?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말야."

"뭐? 누구? 꿈에서 누구를 만났다구?"

나는 뭔가 소중한 것을 순식간에 도둑맞은 기분이어서 홱 돌아섰습니다. 누구? 여자? 어떤 여자?

"어어, 왜 이래 이거. 잘하면 사람 잡겠다, 형."

"너스레 떨지 말고 말해봐 임마. 누구? 여자? 꿈에서? 누구를 만났어?"

"그 왜 있잖아. 재작년에, 대구에서 말야."

"글쎄 누구를 말하는 거냐니까."

"그렇게 물으니까 할 말이 없네. 이름도 모르고 뭐, 거기가 어디였는지도 정확하지가 않고, 가만 있어봐. 그럼 그때 그 여자가 아닌가? 그럼 누구지? 누군데 꿈에서 잠시 만났을 뿐인 여자가 아까는 그렇게도 선명하게 눈앞에서 아른아른 남아 있었던 거지?"

"얘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거?"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그 여자가 누구였지? 여기 오기 전에는, 집에서는 내가 그 여자를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네 거. 아냐, 집에서뿐만 아니라 아까 전에까지도 알고 있었다구. 분명히 그랬다니까.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 거지? 에이 씨, 형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급하게 물어보니까 그만 잊어버린 거 아냐, 이거, 응? 아까는 내가 그 여자를 분명히 알고 있었단 말야.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단 말야, 정말이야."

"아까 알았으면, 왜 지금은 모른다는 거야."

"형도 참, 내가 그걸 알면 왜 이러겠냐. 어쨌든 집에서는 내가 그 여자를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단 말야. 그 느낌이 어찌나 강한지 아내한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거렸을 정도였다니까. 그래서 그냥 어쩔까, 어쩔까, 망설이다가 운전이고 뭐고 팽개치고 기차를 타버린 거라구. 그 사람 지금쯤은 아마 사색이 다 돼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정말로 그렇네, 이거. 아유 이거 전화를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울에 와 있다는 걸 알면 그 사람 또 되게 걱정할 텐데. 한동안 잠잠하던 병이 다시 도졌나 해서. 형도 그 사람이 내 문제로 얼마나 예민해 있는지 알잖아. 어떻게 하지, 응?"

"야,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거? 안 그래도 심난해서 죽을 지경인데 이게 갑자기 쫓아와서 사람을 아주 말리고 있네, 이거?"

"아, 형이야 뭐 하루이틀 심난한 사람인가. 지은 죄가 있으니까 심난한 것도 당연한 거지, 뭐. 문제는 말야, 형. 그 여자가 내 아내라니까, 형."

후배는 아마도 자기가 무엇을 목적으로 서울행 기차를 탔었는가를 잠시 망각하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기차를 탈 때까지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자기 아내에 대한 생각이 그제서야 떠오른 탓이기도 했겠지만, 갑자기 나를 찾아온 동기 자체가 원래 불분명한 탓이기도 했을 것이었습니다. 꿈에서 만난 여자 때문에 하던 일을 팽개치고 불쑥 서울에까지 나를 찾아나선 것부터가 사실은 엉뚱한 일이기는 했지요. 그것도 누구인지 기억조차 불분명한 여자 때문에 말입니다. 어쨌든 나로서는 관심이 비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 제수씨한테는 내가 이따가 전화해서 적당히 둘러댈 거니까 염려는 그만 접어두고 말이다. 그런데 재작년에 우리가 대구에서 어떤 여자를 만났다는 게 사실이냐?"

"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몰라? 기억이 안 나?"

"음, 전혀."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냐, 형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럼 네 기억이 맞다는 증거를 내놔봐."

"증거? 그거야, 없지. 당연히 없지."

"그러니까 네 기억이 틀릴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 형의 기억이 사라진 거야."

"천만에, 네 기억이 잘못된 거야."

"아니라니까, 그때 우리가 기차에서 내린 것은 딱 한 번뿐이었잖아.
대구에서 딱 한 번 내렸을 뿐이었잖아. 틀려?"

"아니, 그건 나도 기억해. 그때 우리의 여행은 기차에서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니까. 죽기에 좋은 장소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기차에서 일종의 미아가 된다는 거였으니까, 그것만은 분명히 기억해. 그런데 여자는, 아니야, 없어, 전혀 없었어. 그럴만한 마음에 여유도 없었고."

"그럼 난 뭐야. 내가 꿈에서 본 그 여자는 도대체 뭐냔 말야."

"어디 다른 데서 인연이 닿았던 사람이겠지. 그걸 네가 대구에서 만난 거라고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

"아냐, 아냐. 대구였어. 그리고 난 그때 대구에는 처음 가봤던 거란 말야."

두 사내가 똑같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해의 여행에 관한 기억은 우리에게 사실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 주일 가까이 기차를 타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닌 탓도 있었지만 그 당시 우리의 심리상태가 벼랑 끝에 몰린 자의 그런 것이었다고나 할까,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구에서 한 차례 기차를 내려 시가지를 어스렁거리며 돌아다녔던 기억은 두 사람이 똑같이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잊을래야 잊기 어려운 기억이기도 했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때 한 주일 가까이 기차를 타고 다녔지만 어느 특정한 지역에서 기차를 버리고 개찰구를 빠져나온 적이 없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