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

착각과 奸計, 파멸의 사이클

두꺼비네 맹꽁이 2002. 12. 13. 00:17


이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단순한 스토리를 통해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그 발단에서 파멸에 이르까지 전과정을 짜악짝 헌겁이라도 찢어내듯이 찢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주목할만하다.

公 私 구별을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착각에 빠지는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동쪽이나 서쪽이나 구별없이 있어 왔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그런데 이 착각이라는 병은 서민층보다는 중산층 이상 이른바 가진 자들에게서 주로 발견되는 배부른 돼지의 병이다. 먹고 살아가기에도 바쁜 서민들은 착각에 빠지면 즉시 굶어야 하기 때문에 빠지고 싶어도 빠질 여유가 없다.

가진 자들이 더 갖기 위해 심지어는 거지들의 깡통까지도 넘보는 것을 무슨 특권처럼 여기고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풍족한 경제력에다가 정치적인 권력까지 갖추면 착각이라고 하는 이 병은 끔직한 살인병기가 되어버린다. 인종개조를 목표로 자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히틀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불치의 병 착각에 빠진 권력자와 가진 자들에게 있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다 정복의 대상이지 공존의 대상이 아니다.

자, 대단히도 호화스러운 저택을 소유한 의사가 하나 있다. 전공은 산부인과. 어느 날 임산부가 검진을 받으러 온다. 이 부자 의사는 아마도 첫눈에 미모의 임산부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간호사를 내보내고 혼자서 임산부를 눕게 하고 가슴을 풀어헤친다. 의사가 임산부의 가슴을 촉진하는 까닭은 가슴 안쪽의 어떤 변화유무를 파악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이 권위있는 의사의 손은 안쪽보다 바깥쪽에서 무엇을 찾고자 한다.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하는 모양이 영 수상쩍다. 옆에서 보기에도 수상쩍은 이 행동을 임산부 본인이 못 느낄까. 그녀는 어리둥절하고 거북해서 눈을 크게 뜬다.

의사는 어쨌든 전문가다. 여자의 신체와 그 신체의 변화에 관한 한 달통했다고 해도 좋다. 그는 이제 가슴을 놓고 아래로 이동한다. 다리를 벌리게 하고, 임산부가 보는 데서 손에 장갑을 끼는 척하다가는 슬그머니 벗어버린다. 촉진, 그야말로 촉진을 위해서 그는 장갑을 몰래 벗어버린 것이다. 이 행위는 의미심장하다. 장갑을 낀 상태에서의 촉진은 임산부가 주체이지만 장갑을 벗어버린 상태에서는 의사 자신이 주체가 되고 임산부는 한낱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주와 객이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바뀐 그 뒤에 무엇이 있었는가? 제3자는 알 수 없다. 임산부의 스커트 속으로 들어간 의사의 손이 무엇을 했는가는 다만 짐작이나 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짐작의 결과는 불쾌함이다. 이 불쾌함은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된 임산부의 태도를 통해 근거가 충분한 것으로 드러난다. 병실을 나오자마자 쓰레기통 앞에서 헛구역질을 하는 임산부의 환멸에 가득찬 태도 말이다.

그녀는 남편을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고 다시금 환멸에 빠진다. 남편은 신속하게 결론을 낸다. 당국에 고발해야겠다고. 아내는 말린다. 그럴 필요까지야 뭐 있겠느냐고. 남편은 말한다. 제3 제4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자는 고발을 해야 한다고. 옳은 말이다. 사회의 건강성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지켜지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발 사실이 알려지자 그동안 수치심 때문에 감추고 있었던 과거의 피해자들이 속속 나타난다. 자, 이쯤 되면 이 공사 구별을 못하는 권위적인 부자 의사 빠져나갈 길이 없다.

그런데 이 권위적인, 자신의 권위와 부를 배경으로 착각에 푹 빠져 있는 이 의사 그만 자살을 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대책없는 인간이다. 서푼어치도 안 되는 권위를 끝까지 가져가겠다는, 자기 혼자서만 죽어서도 영원히 잘 살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여기서부터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부자에다 권위까지 갖춘 의사에게 가정이 없었을까? 있었다.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그지없이 아름다운 아내도 있었고 이 아내는 임신중이다. 그런데 이 아내, 남편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유산을 한다.

이 여자의 성격은 얼핏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되기도 했던 왕비 마리앙뚜와네트를 연상시킨다. 요새말로 하자면 밥이 없으면 라면이라도 먹을 것이지 왜 굶으면서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냐는 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서글프게 웃겼던 그 여자, 마리앙뚜아네트를 연상시키는 이 남편 잃고 유산을 한 여자는 복수를 다짐했었을까? 무엇을, 왜? 그것을 해석하고 유추하는 것은 독자 아니 관객의 몫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그것을 착각이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착각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평소의 생활태도에서 이 착각의 뿌리는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컨대 그들은 이 세계 내에 존재하면서도 스스로를 이 세계 내에 살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영 다른 종류라는 자기최면을 걸어놓고 달팽이처럼 그 안에서만 살아왔던 것이다. 가진 자들이라 해서 다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열에 여덟 아홉은 자기밖에 모르는 그야말로 별종들이다. 어디어디에 무슨 기부금을 낸다 해도 자신의 이름을 빛내기 위함이지 그 기부금의 사회적인 용도를 위함은 이미 아니다. 이것을 나는 간계라고 부른다.

그렇다. 간계, 간사한 계략. 착각의 늪에 빠진 사람이라면 어김없이 거치게 되어 있는 이 간계의 과정을 자살한 의사의 부인이 필연적으로 걷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간계와 지혜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도 뭐 그리 나쁠 것 같지 않다.

지혜는 <나>와 <너>를 대등한 존재로 파악했을 때 발생하는 끈적끈적한 상생의 분비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너>가 있으므로 해서 <나>가 빛날 수 있다는 인식 이전의 감각적인 앎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따라서 그것은 대립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도 아니며 시종일관 공존이요 상생이며 상보적이다.

반면에 간계는 탐욕의 끝없는 확산으로 눈이 멀어졌을 때 발생하는 철저하게도 폐쇄적인, 역설적이게도 냉철한 이성적인 계산이다. 자,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자. 눈이 멀어버린 자가 이성적인 계산을 했다면, 그 계산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든 권력자와 가진 자들이 망해가는 과정은 마치 하나의 공식처럼 대동소이하다. 탐욕에서 시작된 착각은 그 행진을 멈추지 않는 한 반드시 광기를 띠게 되어 있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까닭으로 주변상황의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고 그래서 미쳐 날뛰다가 종당에는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져버리는 방식으로 멸망해 간다. 마치 그 멸망의 끝에 무엇인가 다른 거대한 탐욕의 소재라도 있다는 듯이 그렇게.

마리앙뚜와네뜨를 연상하게 하는 그 여자, 자살한 의사의 부인,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고발하게 하고 그리하여 자살하게 만든 여자의 집에 유모로 들어간다. 그녀의 일차적인 표적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이의 어머니,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성희롱을 당하고도 남편이 고발한다고 하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만류한 그 착한 여자다. 그 착한 여자를 제거하기 위해 이 착각의 병에 걸린 여자는 온갖 간계를 동원한다.

갓난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집요하게 물려서 자신의 체취에 아이가 익숙해지게 하는가 하면 아이의 아버지를 얄따란 슈미즈 차림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의 착각은 보다 깊어지고 대범해진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착각,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남편이고 그 남편은 오직 자기만을 사랑한다는 착각, 따라서 아이의 생모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적으로 그녀의 의식에 각인된다.

여기서 뭘 더 얘기해야 할까? 그녀의 도저한 자기중심주의적인 착각의 병이 마침내 광기에까지 이르렀다고, 그리하여 애꿎은 부동산업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녀 자신도 끝내는 공식대로 피투성이가 된 채 멸망해야 했다는 얘기를 여기서 굳이 덧붙여야 할까. 아니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적당하다.

이 영화는 사실 그리 짜임새 있는 작품은 아니다. 요람을 흔드는 손이라는 제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극중에 "요람을 흔드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리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적절은커녕 억지스럽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공사 구별을 못하고 날뛰는 자칭 지도자(?)급 인사들이 가지는 착각의 기원을 되새겨보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