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
행복에 대하여 이런생각 저런생각
두꺼비네 맹꽁이
2002. 11. 17. 13:46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사느냐고, 그래도 되느냐고, 미래가 불안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많다고 해봐야 안면이 있고 이물은 없는 몇몇 정도이긴 하지만, 그 몇몇의 질문이 한결같음에 나는 매번 놀란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 분명히 살아 있다. 살아서 많은 것들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느끼며 생각하며 나름대로는 이것저것 구상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유기체인 내가 이 정도면 그럭저럭 행복하다 해도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이상 뭘 더 바래야하나?
삶이란 내가 주도적으로 구상하고 관리해나갈 때 만족도 느껴지는 것 같다. 만족이 있다면 불안이 끼여들 틈은 없을 것이다. 내일 당장 먹을 쌀이 없다 해도, 그것은 약간의 걱정거리는 되겠지만 불안의 근거로까지 작용하지는 않는다.
불안은 내 인생에서 내가 제거되거나 소외되었을 때 발생하는 무엇일 것이다. 현대인의 삶은, 특히나 도시적인 삶은 대부분 내가 제거되거나 소외되어 있다. 그것도 타율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대개가 자율적이다.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을 제거하거나 소외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취직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을 보자.
취직이란 기본적으로 무엇을 말함인가? 하루 중 적어도 삼분의 일 이상을 타인의 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일컬어 취직이라 하지 않는가? 시간으로 치자면 일 년 중 약 백오십 일 정도는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살아주고 있다 해도 그리 틀린 계산법은 아닐 것이다. 그런 생활이 일상적으로 굳어졌을 때, 그리하여 그것이 유전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때 자신과 유사한 삶이 아닌 다른 방식은 죄다 이상하고 불안하게 비쳐지기도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상이, 우주가, 놀이터가 자꾸 좁아져 가는 것이다.
좁아터진 세상에서는 <너>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너를 배려할 여유가 없는 판에 <우리>란 가당치가 않다. 너도 없고 우리도 없고 오직 내가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나는 불안하고 소외감을 느끼고 심하면 대인기피증에 빠지거나 더 심하면 우울증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그런데 이른바 통치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일 수 있다. 무엇보다 우선 관리하기가 쉽고 길들이기가 쉬우니까. 푸코가 말하는 원형감옥이란 실상 다른 게 아니다. 온갖 시험이며 경쟁을 거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지고 틀이 잡혀버린 현대인의 삶이야말로 거대한 원형감옥 속의 죄수들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수학능력 시험이라는 제도에서 이것은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난이도가 얼마라느니, 예년 대비 몇 점이 오를 거라느니, 떨어질 거라느니 어쩌고 삶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껍데기를 놓고 이렇쿵저렇쿵 아우성을 치는 수학능력 시험만큼 우리네 삶의 좁아터짐과 길들여짐을 실감하게 하는 소스가 달리 또 있을까.
문제는 그러한 시험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점차 사라져간다는 점이다. 철새라고 불리는 미숙한 정치꾼들의 그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깊은 아이러니가 있다. 시험을 위해, 경쟁을 위해 주어진 명제를 외우고 읽히며 강력하게 나를 주장하는 동안 역설적으로 내 생각은 끼여들 자리를 잃어버린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있으면서도 마치 없는 것처럼 학습에 의해 주입된 타인의 말이나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된다는 것, 이것은 뭐랄까, 잊을만하면 가끔 나타나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음모론을 한 번쯤은 신중하게 짚어볼 것을 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집단이 있어서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식으로 가끔씩 회자되는 음모론이 만에 하나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볼 때 우리의 살아가는 모양이란 실로 웃기지도 않게 웃기는 코미디 정도나 될까. 아니면 귀엽고 사랑스런 무슨 벌레나 혹은 강아지쯤? 우리가 애완용으로 벌레를 기르고 강아지를 기르듯이 그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