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

내가 참 무정하게 살아왔구나

두꺼비네 맹꽁이 2002. 10. 28. 19:24


어제 저녁 이곳에는 서리가 내렸었나봐.
아니 어제 저녁이 아니라 오늘 새벽이었겠다, 참.

해가 떠올라와서 기온이 올라가니까 꽃밭의 꽃들이
기를 잃고 늘어져 버렸어. 마치 더운물에 살짝 데친
시금치처럼 말야. 이파리들은 제 색깔을 잃어버렸고
정갈하게 오므리고 있던 꽃송이들은 빨려고 내던져놓
은 빨래감처럼 파편화된 채 흩어진 꼴들이야.

내가 능동적으로 무엇을 살피다가 그것을 발견한 것
은 아니야.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
었더랬어. 그야먈로 무심히 그 앞을 지나치고나 있던
중이었던 거지.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께서, 동사무소
앞 작은 꽃밭을 쳐다보며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듯
이 그러시는 거야.

"세상에 이걸 어떻게 해, 어떻게 해, 꽃들이 다 죽어
버려 가네."

그리 큰 소리도 아니고, 낮은 소리도 아니었어. 마
치 복화술사의 그것처럼 말야. 저기 어디 하늘이나 혹
은 땅속에서 들려오는 듯이 깊고 무거운 목소리로 그
러시는 거야. 아주머니가. 그러면서 나를 보는데, 죽
어버려 가는 꽃들을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이 나를 보
는데 말야. 멍청한 나는 그때까지도 <이 여자>가 왜
저렇게 넋이 빠진 눈으로 나를 보나, 그러고나 있었
던 거야.

그러다가는 무슨 영감처럼 그것을 발견한 거야. 데
친 시금치처럼 늘어진 이파리와 파편화된 꽃송이들
을. 그때 그 순간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느낌이었어.
아, 꽃이 죽어가는 계절이 되었구나, 하고, 그런 한갓
진 생각을 한 것은 나중이었고, 우선은 뭔가가 그냥
아득해져 버리는 거야.

아마도 아주머니의 그 말씀 중에 죽어버려 가네, 이
대목이 다시금 떠올라 왔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그
냥 죽었네도 아니고, 죽어가네도 아니고, 죽어버렸네
도 아닌, 죽어버려 가네, 이거, 이거 말야. 그 어떤
느낌표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아주머니의 그 한 마디
가 아마 내 심장을 화살처럼 뚫고 들어왔던가봐.

발이 떨어지질 않는 거야. 괜히 하늘을 쳐다보다가,
내 발끝을 쳐다보다가,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다가 사
람들을 보다가. 그렇게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더랬어. 미친 듯이, 미쳐버리
고 싶은 듯이, 내가 내 집을 못 찾아서 기가막혀버린
상태, 꼭 그런 기분으로 그렇게 말야.

죽어간다는 것이 그렇게도 충격적으로 나를 흔들어놓
은 적은, 내 경험의 갈피를 아무리 뒤져봐도 내게는
일찍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 물론 아주머니의 그
독특한 어법이 거들어준 결과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한순간에 나 자신의 비어 있는 자리를 발견했던 거
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별 관심
이 없이 그냥 지나쳐 왔던가 하는, 바로 그것을, 마
치 길거리에서 진주라도 큰 걸로 하나 줍듯이 발견했
던 거야. 그때 내 입에서 나온 말이 그거였어. 저기
어디 하늘에서나 들려오는 소리를 내 입이 받아서 내
영혼에게 전하듯이 말야.

"아, 내가 그동안 참 무정하게 살아왔던 거로구나."

그런 뒤에 곰곰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더라구. 두
눈 부릅뜨고 살핀다고 살피면서 걸어 왔지만 진실로
봐야 할 것은 대부분 그냥 지나쳐왔던 거야. 눈길을
주어야 할 곳이 너무도 많아서였던 것일까. 아닐 거
야. 아마도 꼭 그렇지만 않을 거야.

그런데 우리가 진실로 봐야 할 것이란 또 무엇일까.
지금 나는 그것이 몹시 궁금해서 목이 말라. 무엇일
까. 우리가 살면서, 살아 있다는 증거로 내세울만한,
살피고 보살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꽃일까? 아니야. 꽃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할 거야. 꽃보다 중요한 무엇인가, 무엇
인가가 있어. 있을 거야. 아니 꼭 있어야만 해. 그런
데 반드시 있어야만 할 그 무엇이 무엇이냐는 거지.
무엇이지?



아래 그림은 내가 그때 얻어맞은 번개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