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들
자살에의 열망으로 잠못 이룬 적 있었어?
두꺼비네 맹꽁이
2002. 10. 18. 21:55
자살에의 열망으로 잠못 이룬 적 있었어?
물론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 정도는 있을 거야. 사람이 만약에 그런 경험도 없다면 뭐랄까. 나는 그래. 그런 인생은 너무도 뻔뻔할 것 같다는, 다분히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살을 꿈꾸며 가슴 설레어본 경험도 없는 사람의 삶이란 말이야. 솔직히 그렇잖아. 아직 공사중인 우물의 물처럼 탁하고 혀에 감기는 맛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나는 문득문득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곤 해. 죽음과 친하지 않은 자와는 삶을 얘기하지 말라.
촛불을 켜놓고 밤을 밝혀본 사람은 알 거야. 촛불의 미세한 흔들림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빛과 그림자를 뿌리며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는가를, 스스로를 태워 없앤다는 것이 얼마나 매혹적으로 우리의 삶을 흔들며 다가오는가를 말이야. 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담배도 안 피우고 술 생각도 없이 눈만 뚱그렇게 혹은 갸르스름하게 뜬 채로 밤을 밝혀본 사람은 알 거야.
아니 뭐 꼭 밤이 아니래도 괜찮아. 대낮이라도 상관없어. 어쩌면 대낮의 그것이 더 강렬하지도 모르지 이를테면 창문을 꽁꽁 막아버리고서 말이야. 담요 같은 두터운 것으로 햇볕과 공기와 바람 등등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하고서 한 자루의 촛불을 켜고 그 앞에 책상다리로 앉아 고즈넉이 응시를 하는 거야.
이게 중요해. 응시한다는 거. 내가 촛불을 보는 게 아니라, 쳐다보는 게 아니라 응시하는 거야. 이를테면 촛불을 사물로서가 아니라 나와 동격의 영혼을 갖춘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지. 연인들이 서로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읽어내듯이 말이야.
그 왜 사랑에 빠지면 그렇잖아. <나>는 사라지고 <너>만 남게 되잖아. <너>를 통해 <나>의 저 아래 바닥을 발견하고는 좋아라고 행복해하면서 죽음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의 용기를 갖게 되어지잖아.
바로 그런 거, 애인의 영혼 속으로 내 영혼을 흘려넣듯이, 녹여없애듯이 순정한 마음으로 촛불을 응시하노라면 그때 홀연히 다가오는 그림이 있는데 그게 아마 자살에의 아늑한 욕망으로 옷을 해입은 삶의 모습이라는 거야. 내 생각으로는 그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序詩의 한 구절처럼, 촛불이 틱틱거리며 타오르를 때의 그 미세한 소리를 나의 영혼은 순간순간 해독을 하고 조용히 응답을 하는 거야.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네가 일깨워주었구나, 고마워. 이제는 내가 너에게 너의 살아 있음을 일깨워줘야지."
촛불 덕택으로 영혼이 순정하게 정화된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거야. 그리하여 나는 이제 촛불에게 촛불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도록 해주고 싶어지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 촛불에 나의 육체를 태우면, 그러면 촛불로 하여금 촛불 자신의 살아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일까?
그때부터 나는 순간순간 촛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하게 되지. 하나의 작은 불꽃에 불과했던 촛불은 어느새 그토록이나 거대한 호수로 변해 있는 거야. 불의 호수 말야.
촛불을 켜놓고 한 번 자세히 응시를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촛불은 얼핏 주황색이지만 그 주황색 속에 파란 것이 있다는 것을. 촛불의 핵이라고나 해야 할 그 작은 파란 것이 거대한 호수로 변해가는 장면을 상상해봐. 어떻게 그 속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가 있겠어. 어떻게 그 속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욕망이 안 생길 수가 있겠어.
하지만 안심해. 나는 곧 그것이 호수가 아니라 한 자루의 작은 촛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이를테면 그것은 촛불의 유혹에 반응을 한 나의 영혼이 촛불과 더불어 동침을 한 기념으로 내게 준 한 차례의 미망이요 몽상이었다는 것을 나는 곧 알게 되어진다는 거야. 촛불의 몽상.
육체의 자살 같은 것은 없어. 영혼의 자살이 한 차례 있었을 뿐이지. 그리고 육체의 자살 따위는 사실 중요하지도 않아. 자살의 욕망은 바꿔 말하면 정화의 욕망인데 육체의 자살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 영혼이 이미 자살을 통해 정화되어 있는데 말야. 요컨대 촛불에 의해 육체의 자살을 꿈꾸었던 나는 다시 촛불에 의해 정화된 새 삶을 얻게 되는 거야.
생각해봐. 육체의 자살을 무기로 협밥하는 자들의 그 행위의 유치함을 말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생각해봐. 죽음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족하게 해주는가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어디까지나 순정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봐. 거기에 촛불이 있다면 더욱 좋겠지. 그래봐. 촛불을 켜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며, 응시를 하며 죽음과 삶이 어떤 끈으로 어떻게 맺어져 있는가를 생각해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다음 그림을 봐봐. 꽃이야. 얼음 속에서 핀, 이름은 애기복수초. 삶이 무엇인가를, 어쩌면 알게 되는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거야.

물론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 정도는 있을 거야. 사람이 만약에 그런 경험도 없다면 뭐랄까. 나는 그래. 그런 인생은 너무도 뻔뻔할 것 같다는, 다분히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살을 꿈꾸며 가슴 설레어본 경험도 없는 사람의 삶이란 말이야. 솔직히 그렇잖아. 아직 공사중인 우물의 물처럼 탁하고 혀에 감기는 맛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나는 문득문득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곤 해. 죽음과 친하지 않은 자와는 삶을 얘기하지 말라.
촛불을 켜놓고 밤을 밝혀본 사람은 알 거야. 촛불의 미세한 흔들림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빛과 그림자를 뿌리며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는가를, 스스로를 태워 없앤다는 것이 얼마나 매혹적으로 우리의 삶을 흔들며 다가오는가를 말이야. 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담배도 안 피우고 술 생각도 없이 눈만 뚱그렇게 혹은 갸르스름하게 뜬 채로 밤을 밝혀본 사람은 알 거야.
아니 뭐 꼭 밤이 아니래도 괜찮아. 대낮이라도 상관없어. 어쩌면 대낮의 그것이 더 강렬하지도 모르지 이를테면 창문을 꽁꽁 막아버리고서 말이야. 담요 같은 두터운 것으로 햇볕과 공기와 바람 등등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하고서 한 자루의 촛불을 켜고 그 앞에 책상다리로 앉아 고즈넉이 응시를 하는 거야.
이게 중요해. 응시한다는 거. 내가 촛불을 보는 게 아니라, 쳐다보는 게 아니라 응시하는 거야. 이를테면 촛불을 사물로서가 아니라 나와 동격의 영혼을 갖춘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지. 연인들이 서로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읽어내듯이 말이야.
그 왜 사랑에 빠지면 그렇잖아. <나>는 사라지고 <너>만 남게 되잖아. <너>를 통해 <나>의 저 아래 바닥을 발견하고는 좋아라고 행복해하면서 죽음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의 용기를 갖게 되어지잖아.
바로 그런 거, 애인의 영혼 속으로 내 영혼을 흘려넣듯이, 녹여없애듯이 순정한 마음으로 촛불을 응시하노라면 그때 홀연히 다가오는 그림이 있는데 그게 아마 자살에의 아늑한 욕망으로 옷을 해입은 삶의 모습이라는 거야. 내 생각으로는 그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序詩의 한 구절처럼, 촛불이 틱틱거리며 타오르를 때의 그 미세한 소리를 나의 영혼은 순간순간 해독을 하고 조용히 응답을 하는 거야.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네가 일깨워주었구나, 고마워. 이제는 내가 너에게 너의 살아 있음을 일깨워줘야지."
촛불 덕택으로 영혼이 순정하게 정화된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거야. 그리하여 나는 이제 촛불에게 촛불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도록 해주고 싶어지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 촛불에 나의 육체를 태우면, 그러면 촛불로 하여금 촛불 자신의 살아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일까?
그때부터 나는 순간순간 촛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하게 되지. 하나의 작은 불꽃에 불과했던 촛불은 어느새 그토록이나 거대한 호수로 변해 있는 거야. 불의 호수 말야.
촛불을 켜놓고 한 번 자세히 응시를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촛불은 얼핏 주황색이지만 그 주황색 속에 파란 것이 있다는 것을. 촛불의 핵이라고나 해야 할 그 작은 파란 것이 거대한 호수로 변해가는 장면을 상상해봐. 어떻게 그 속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가 있겠어. 어떻게 그 속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욕망이 안 생길 수가 있겠어.
하지만 안심해. 나는 곧 그것이 호수가 아니라 한 자루의 작은 촛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이를테면 그것은 촛불의 유혹에 반응을 한 나의 영혼이 촛불과 더불어 동침을 한 기념으로 내게 준 한 차례의 미망이요 몽상이었다는 것을 나는 곧 알게 되어진다는 거야. 촛불의 몽상.
육체의 자살 같은 것은 없어. 영혼의 자살이 한 차례 있었을 뿐이지. 그리고 육체의 자살 따위는 사실 중요하지도 않아. 자살의 욕망은 바꿔 말하면 정화의 욕망인데 육체의 자살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 영혼이 이미 자살을 통해 정화되어 있는데 말야. 요컨대 촛불에 의해 육체의 자살을 꿈꾸었던 나는 다시 촛불에 의해 정화된 새 삶을 얻게 되는 거야.
생각해봐. 육체의 자살을 무기로 협밥하는 자들의 그 행위의 유치함을 말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생각해봐. 죽음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족하게 해주는가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어디까지나 순정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봐. 거기에 촛불이 있다면 더욱 좋겠지. 그래봐. 촛불을 켜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며, 응시를 하며 죽음과 삶이 어떤 끈으로 어떻게 맺어져 있는가를 생각해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다음 그림을 봐봐. 꽃이야. 얼음 속에서 핀, 이름은 애기복수초. 삶이 무엇인가를, 어쩌면 알게 되는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