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바보 코보(29)
오리 연구를 시작하다
오리가 알을 낳기 시작한 뒤로 시간이 금방금방 흘렀다. 내일은 알을 몇 개나 낳을까, 궁금해서 내일을 기다리노라면 시간이 그렇게 느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기다리던 ‘내일’이 어느새 와 있곤 했다.
후텁한 더위도 끝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오리는 거의 매일 알을 낳았다. 어떤 날은 달랑 한 개만 있기도 했지만, 아예 한 개도 없는 날은 이제 없었다. 자기들이 낳은 알을 자기들이 발로 차거나 부리로 밀어서 물속에 처박아 버리는 버릇은 여전했다.
코보는 무엇보다도 오리의 그런 행동이 재미있고, 신기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어떤 날은 올챙이 사냥도 포기하고 하루 종일 그 순간만 기다리며 울타리 밖에서 지켜보았다. 그런 날은 책을 읽어도 읽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적어도 삼십 초에 한 번씩, 아니 어쩌면 십 초에 한 번씩 고개를 들어 오리의 행동을 관찰해야 했기 때문에, 문득문득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야, 너네들은 근데 새끼도 못 까면서 알을 왜 낳는 거냐?”
코보는 정말로 그것이 궁금했다. 알을 낳아놓고도 소중히 여기지를 않고 아무렇게나 막 차고 굴리는 이유도 결국은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낳고도 자기가 새끼를 낼 수 없으니까, 그래서 짜증도 나고 심술도 나고 자신의 운명이 억울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렇게 자기가 낳은 알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것 같았다.
그날도 코보는 오리 울타리 밖에 골판지를 깔아놓고 차분하게 책상다리로 앉아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는 있었지만 관심은 역시 오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당으로 누가 들어왔어도 들어온 줄도 몰랐다. 손님의 그림자가 바로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는데도 몰랐다.
“야, 넌 사람이 들어와도 모르냐.”
뜻밖에 태권브이가 서 있었다. 청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는 예전과 같았지만, 표정은 뭔가 얻으러 온 사람처럼 부드러웠다. 그날 돈 봉투를 받은 직후에 보여준 살짝 겁을 먹은 당혹스런 표정도 아니었다. 착한 아이처럼 그냥 부드럽기만 한 태권브이의 그런 표정이 코보는 낯설었다.
이게 뭐냐, 꿈이냐?
코보는 그대로 앉은 채 눈만 서너 차례 깜빡거렸다.
“넌 정말 끝까지 학교는 안 다니고 말 거냐?”
뜻밖에 찾아온 태권브이는 그렇게 뜻밖의 말을 하고 있었다. 코보는 그제야 엉덩이를 살짝 일으켰다. 그러나 일어서지는 않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태권브이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태권브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슬쩍 외면하고 있었다. 코보는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학교 다녀라, 너도.”
태권브이는 시선을 오리 울타리 쪽으로 둔 채 또박또박 말했다.
“난 학교 안 가.”
코보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 때문이라면, 걱정 안 해도 돼.”
“아니야, 옛날에는 네가 무섭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오리를 공부해야 해. 그게 더 중요해. 오리는 왜 자기가 낳은 알로 자기 새끼를 까지 못하는 걸까. 나한테는 그게 더 중요하거든.”
“오리가? 새끼를 못 까는 거냐?”
태권브이의 시선이 코보의 얼굴을 훑었다.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코보는 그런 태권브이가 이상해 보였다. 이상해 보여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마구 설명을 해 주었다.
“너는 몰랐구나? 나는 예전에 알았는데, 알면서도 몰랐다가 요번에 제대로 알았거든. 네가 원하면 우리 마당과 오리를 개방할 수도 있어. 궁금하면 언제든지 와. 하여튼 난 그래, 오리는 왜 자기 알을 자기가 까지 못하는지 궁금해 죽겠어. 그래서 그걸 꼭 알아내고 싶어.”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학교 갈 생각이 없는 거냐?”
“나는 거짓말 안 좋아해.”
“정말이지? 나 때문이 아니지?”
“난 너희들이 원하면 죽을 때까지 매일 오백 원씩 납부할 수도 있어. 왜냐하면 이젠 나도 돈을 버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서운 것은 아니라는 얘기야. 정말이야. 난 오리가 중요해. 다른 것은 안 중요해.”
태권브이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문이 막힌다는 듯 한동안 고개만 갸웃갸웃 하고 있었다. 코보는 한 마디 더 보탰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있어. 나는 오리의 말을 번역할 거야. 학교에서는 그런 공부 못 하거든.”
“뭐? 번역? 오리의 말을?”
태권브이는 경악스럽다는 투의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는 듯 혼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야. 난 오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거든. 근데 그게, 알아들을 수 있으면서도 어려워서 말이야. 그래서 아직 그 말을 사람의 말로 번역하지는 못해. 그래서 그걸 하려는 거야.”
코보는 태권브이가 무슨 생각을 하건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오리의 말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은 전부터 해 온 생각이 아니었다. 오리는 왜 자기가 낳은 알을 자기가 새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 풀어보고 싶었지만 언어의 문제는 전혀 뜻밖에, 느닷없이, 불쑥 떠오른 생각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불쑥 해버린 말이었지만, 해놓고 생각해보니 그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그것 때문에 날마다 오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난 오리의 말을 번역할 거야.
제3의 존재가 번역해주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번역한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도 코보는 가슴이 쿵당쿵당 뛰었다. 쿵당쿵당 뛰는 가슴으로 그런 다짐을 하고 있는 순간 코보의 눈에는 태권브이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그림자 같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야, 너 일기 쓴다고 했지. 그것이나 좀 보여주라.”
태권브이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요새는 오리의 말을 번역하느라 바빠서 안 써.”
코보는 귀찮아서 얼결에 거짓말을 했다.
“요새 꺼는 나도 관심 없어. 옛날에 쓴 것 좀 보여주라.”
태권브이는 한 발 가까이 다가서며 집요하게 덤볐다. 그제야 코보는 아하,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더욱 거짓말을 해야 했다.
“옛날에도 안 썼어. 너한테 오백 원씩 준 거, 그런 이야기도 내 일기에는 없어.”
“뭐어?”
태권브이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어서 퉤악, 소리를 내며 침을 뱉었다.
태권브이는 코보를 미쳤다고,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코보는 태권브이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상관없는 태권브이가 무슨 말을 하건 말건,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가건 말건 코보는 오리를 쳐다보며 오리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리는 수컷이 암컷보다 컸다. 날갯죽지 두 개는 더 큰 것 같았다. 깃털도 수컷이 윤기가 흐르고 매끈해 보였다. 소리는 암컷이 사람으로 치자면 남자에 가까웠다. 수컷은 완전히 여자의 목소리였다. 암컷이 굵고 높은 소리로 꽤액꽤액 한다면 수컷은 가늘고 연약한 소리로 꽤애꽤애 하는 식이었다.
“야아, 이것 참 희한하네.” 코보는 왼손으로 턱을 감싸 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하면 뭔가 답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고 ‘희한한’ 일만 계속 발견되었다. 암컷은 특이한 버릇이 있었다. 고개를 땅 쪽으로 길게 빼고 연거푸 주억거리며 꽤꽤꽤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수컷은 하늘 쪽으로 고개를 길게 빼고 꽤애꽤애 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코보는 애가 탔다. 말은 분명히 말인데 번역이 불가능했다. 번역이 불가능한 이유는 누구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오리의 말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오리의 말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 없고 보면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모르는 것이 거의 없는 할머니도 그 대목에서는 말문이 꽉 막혔다.
이건 사건이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