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위대한 바보 코보(18)

두꺼비네 맹꽁이 2021. 4. 22. 09:35

생리와 몽정은 같은 것일까

 

야 그건 몽정 같은데, 몽정 아냐? 혹시 너 그것도 모르는 거 아니냐?”

초아는 너무도 쉽게, 너무도 간단하게, 너무나 태연하게 마치 따지고 덤비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코보는 놀라서 후딱 사방을 둘러보고,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런 얘기는 날아가는 새도 듣지 못하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초아는 그렇지 않은가 보았다.

, 너 왜 그래. 부끄러워? 그런 거야?”

 

아이 씨이, 나도 안단 말이야.”

코보는 투덜거리며 후딱후딱 삽질을 했다. 가로 2미터에 세로 3미터의 웅덩이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끝날 참이었다. 마당이 단단해서 처음에는 곡괭이질을 하느라 땀을 빼기도 했지만, 겉흙을 긁어내고 난 뒤에는 삽도 제법 잘 들어갔다.

 

곡괭이질이나 삽질이나 처음에는 모두 초아가 주도했다. 그 요령을 알고 난 뒤에는 코보의 힘이 더 유용하게 쓰였다. 그때부터 초아는 삽을 코보에게 맡기고 자신은 퍼낸 흙으로 언덕을 쌓았다. 그렇게 하면 깊이 오십 센티미터만 파내도 일 미터 깊이의 웅덩이를 만들 수 있었다.

 

말 안 해?”

초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예 차분히 쪼그리고 앉아서 코보를 보고 있었다.

바보야, 그런 건 자꾸 얘기를 해야 하는 거야.”

 

.”

너 몽정 때문에 고민이 많잖아. 그게 몽정인지도 몰랐던 거 맞지?”

아무래도 누나는 가슴 속에 강이 일흔한 개나 두 개쯤 있는 것 같아.”

코보는 삽질을 멈추고 숨을 헐떡거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얼굴을 지나 목으로 흘러 내렸다.

 

? 무슨 강?”

할머니가 그러셨어.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일흔 개의 강을 품고 있다고.”

코보는 삽을 손에 든 채 초아가 쌓아놓은 언덕에 걸터앉았다.

아 그거. 태어나서 삼칠은 이십 일, 죽어서 사십구 일. 합해서 칠십 일. 그것을 강으로 표현하셨다, 이거지? , 괜찮은데, 연구를 좀 해봐야겠다. 그건 그렇고, 너 계속 누나라고 할래? 하지 말랬잖아.”

 

사람이 말이야. 부끄러운 줄도 알아야지. 뭐냐 그게. 이름 하나 바꾼다고 뭐, 사람도 달라지나.”

코보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초아는 키득키득 웃어대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고 있다가 쐐기를 박듯이,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넌 아직 뭘 몰라. 어쨌든 누나 소리는 빼라고.”

 

알았다고.”

어쨌든 넌 네가 하는 게 몽정인지도 몰랐잖아. 맞지?”

나도 다 알고 있었네, 이 사람아.”

오호, 제법인데?”

그렇지만, 그런 것 정도 안다고 끝나는 게 아니란 말이거든.”

 

당연하지. 알았다고 해서 끝나버리는 건 없지.”

암튼 누나는 그런 거 없지? 좋겠다.”

또 누나. 너 맞을래?”

아이 씨이, 멀쩡한 누나 두고 바리가 뭐야, 바리가아.”

코보는 몸부림을 쳐대며 악을 썼다.

 

좋아. 사흘 정도 숙성 기간을 주지. 암튼 말이야. 네가 몽정으로 괴로워하는 것 이상의 것을 나는 하거든. 생리 말이야, 생리, 난 생리를 한다고.”

 

생리? 생리라고? 으악, 뭐 저렇게 뻔뻔하냐.

코보는 입을 헤 벌린 채로 초아를 보았다. 그 얼굴은 차마 못 보고 그저 그쪽으로 멍하게 시선을 보냈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아는 자기 말을 하고 있었다.

 

넌 그게 얼마나 이상한지 모를 거야. 나는 그것 시작하면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져 버렸었거든.”

, 그래서 학교를 그만둔 거야?”

겨우 한 마디가 나왔다.

아니,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었지. 열심히 하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계속 일등을 했었고, 그렇게 하다 보니 알 것 같더라.”

 

어떻게? 뭘 알았어?”

그때 언제인가 선생님이 말씀하셨거든. 이대로만 계속 가면 대학까지 장학금은 따논 것이라고. 그 말씀을 듣고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장학금이 뭐 그렇게 중요하지? 그런 의문이 드는 거야.”

근데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한 번도 안 했어?”

하면, 네가 뭐, 해결해 줄 것도 아니면서 뭘.”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 그래도…….”

 

코보는 다시 삽을 들고 일어섰다. 제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할 수 없는 말이 사람에게 있기 마련이라는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위기도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비밀이 있을까? 뭘까?

코보는 삽날을 땅에 댄 채 발을 들어 올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초아는 쪼그려 앉은 채로 어디 먼 데를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슬레이트 지붕 위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초아는 여태까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가도 다 잊어버린 표정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상자 안에서 오리들이 꽤꽤, 아우성을 쳤다. 날마다 이 시간쯤이면 철도다리 아래 물에서 놀았는데 오늘은 무슨 까닭이냐고, 왜 이렇게 답답하게 가둬만 두느냐고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코보는 삽을 땅에 콱, 박아놓고 오리 상자 앞으로 갔다. 비닐이 젖어 있었다. 아이가 오줌을 싸고 나면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운다는 것처럼, 오리도 아마 비닐을 갈아달라고 아우성인 것인지도 몰랐다. 젖은 비닐을 빼 내고, 새 비닐을 깔아주고, 빼 낸 비닐을 물에 씻어서 빨랫줄에 널고 돌아설 때까지도 초아는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인 채 먼 데를 보고 있었다.

 

일 안 해?”

코보는 짐짓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초아는 아아 참, 하는 투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넌 막연하게라도 아빠 엄마를 기다리는 맛을 알지만, 난 그 맛을 전혀 모르거든.”

 

? 그게 뭔 소리야?”

난 있지. 내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우리 아빠 엄마가 왜 자살을 했는지,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 말고,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게 뭔 소리냐.

자살? 자살? 교통사고 아니었어?”

코보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니야, 아니야. 사실은 나도 잘 몰라. 얼른 일 하자. 오늘 중으로 이건 끝내야지. 그래야 내일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할 수 있지.”

초아는 도로 갑자기 명랑해졌다. 무심결에 실언을 했다는 투였다. 코보는 초아의 명랑함을 믿지 못했다.

 

에이 뭐야. 괜히, 놀랐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코보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뭘 감추고 있는 거지?

코보는 흙 한 삽을 퍼서 내놓고는 가만히 서서 하늘을 보았다. 초아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있지. 초딩 사학년 이 학기 때 생리를 시작했거든. 그때 너무 이상해서 학교를 이틀이나 결석했거든. 너도 아마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억이 날 거야. 우리가 맨날 만나다가 그때 이틀 동안 안 만났으니까. 암튼 그때 그런 의심이 들었었어. 교통사고가 아니라 자살일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그러니까 그, 그것 때문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던 거라고?”

 

생리라는 단어를 도무지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코보는 믿기가 어려웠다. 초아는 여전히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꺼낸 말을 취소하려고 다른 말을 했는데 다른 말은 사실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꺼낸 말이 사실일 것 같은 느낌이어서 뒷맛이 영 개운치가 못했다.

 

너도 몽정 때문에 오리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둥,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던 거라면서? 그래서 반찬거리 살 돈으로 느닷없는 오리를 샀고, 아니야?”

초아는 먹기 싫다는 밥을 억지로 먹여주듯이 우격다짐을 하고 있었다. 코보는 어이가 없었지만 답변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냐, 난 그때 틀림없이 오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었어.”

나도 네가 처음 그런 말을 했을 때는 믿어주었지만, 지금은 안 믿어. 안 믿고 싶어. 왜냐하면 너도 내 말을 안 믿어주니까.”

 

코보는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초아는 꼴도 보기 싫다는 투로 호미질을 시작했다. 일이 참 묘하게 되었다. 아무튼 몽정이든 생리든 그런 것이 처음 시작될 때는 뭔가 다른 것이 보이기도 하고,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안 하는 신경전 같은 것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코보는 묵묵히 삽질을 하고, 초아는 묵묵히 코보가 퍼낸 흙으로 언덕을 쌓았다. 만약에 그날이 사회복지사 아줌마가 오는 날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아마 그렇게 심통이 난 채로 일을 끝내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 버렸을 것이었다.

 

아유, 이게 다 뭐야, ?”

소리가 먼저 들리고, 사람은 나중에 보였다. 마당이 너무 어수선한데다가, 삽으로 파낸 흙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어서 사람이 들어와도 그 사람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초아를 발견한 사회복지사 아줌마가 깜짝 반가운 소리를 냈고, 초아도 역시 벌떡 일어서며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그때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아이고 세상에, 오리가 상전이네. 큰 상전을 모셔 왔어. 아이고 어쩔까. 두 식구 살기도 어려운 살림에 아이고 어쩔까, 큰일났네.”

설명을 다 듣고 난 뒤에 나온 사회복지사 아줌마의 걱정 가득한 소감 한 마디가 코보를, 초아를, 크게 웃겨주었다. 그것으로써 두 사람의 신경전은 끝났다. 잠시 뒤에 초아는 자기 집으로 갔고, 코보는 사회복지사 아줌마를 방으로 안내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