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위대한 바보 코보(1)

두꺼비네 맹꽁이 2021. 3. 24. 08:57

장보러 갔다가

 

코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망태기를 둘러매고 할머니 앞에 섰다. 활짝 핀 개나리 꽃 밑에서 병아리가 금방 삐약, 소리를 내며 걸어 나올 것 같은 날이었다. 책을 보는 것도, 일기를 쓰는 것도, 장보러 가는 것도 다 귀찮아서 언제까지나 그냥 앉아 있고만 싶은 날이었다.

 

벌써 며칠 째인지 몰랐다. 잠자는 시간이 두려웠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에서 깨는 시간이 끔찍했다.

 

아주 낯선, 무엇인가 못된 누군가가 자고 있는 동안 깨진 달걀 같은 것이라도 팬티 속에 슬쩍 넣어놓은 것만 같은, 끈적끈적하고 질척거리는, 그 엽기적인 시간이 두렵고, 창피하고, 헷갈려서 미칠 것 같았다.

 

미칠 것 같은 기분 나쁜 시간이 하루를 모두 가불해 버렸다. 팬티 한 장을 후딱후딱 남모르게 빨아서 방구석에 널었을 뿐이었다. 그밖에는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게 오전이 지나고, 오후도 바쁘다고 서둘러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부끄러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후딱 해치워야만 비로소 안심이 되는 까닭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쌌을 때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창피하진 않았었다.

 

별 일이네. 우리 떠벌이 왕자님이 요새 어째 이다지도 조용해지셨을까-?”

몰라요. 말 시키지 마요.”

하이고, 저 툭 튀어나온 코 좀 보라지. 오늘따라 우리 왕자님 코가 그냥 남산만 해져서, 남산이 나한테 무너지면 어쩔까, 할미가 그냥, 무서워 죽겠네.”

 

할머니는 정말로 보이는 것처럼 손으로 눈까지 가리면서 말하고 있었다. 코보는 이상해서 허리를 굽히고 다가서며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았다.

 

에이 또 속았잖아.”

 

저도 몰래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할머니는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내며 앉은걸음으로 부엌 싱크대를 향해 다가갔다. 서랍을 열고 작은 항아리를 익숙하게 끄집어낸 할머니는 그 안에서 돈을 꺼내들며 콩나물 오백 원어치, 자반고등어 한 손, 안 깐 마늘 다섯 통, 대파 열 개짜리 한 단, 감자 일 킬로그램 등등을 마치 공책에 적어놓은 글을 읽듯이 열거해 나갔다.

 

아이고, 코보 장보러 가는구나. 같이 가줄까?”

밖으로 나서자마자 꼴도 보기 싫은 촉새 아줌마와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코보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풀이 죽었을까? 오오, 너 아직도 우리 초아를 못 잊고 있나 보구나?”

 

남자처럼 굵은 촉새 아줌마의 목소리는 살짝 들떠 있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투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코보는 다시 옆으로 비켜섰다. 그래도 길은 열리지 않았다. 확 받아버릴까?

 

두 눈 딱 감고,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멧돼지나 황소처럼 머리로 들이받고 내달리면 끝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참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꾹 눌러 참느라고 양 볼을 씰룩거리면서 코보는 한 번 더 옆으로 비켜섰다.

 

초아가 무슨, , 비켜요, 재수 없어.”

, , , 재수? 너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올래? 이러면 네가 초아를 짝사랑했다고 동네방네 다 불어버린다?”

그딴 지지배를 누가 뭐, .”

뭐야, 지지배? 얘가 누나한테?”, 누나는 무슨, 개뿔이나.”

 

코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기 시작했다. 등에 맨 빈 망태기가 출렁, 출렁. 거침없이 출렁대는 것이 마치 잘 했다고 응원이라도 해주는 것 같았다. 코보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 망태기가 신기하다는 듯 보고 또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배시시 웃거나 눈을 잇달아 깜박거렸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도 야채가게와 생선가게는 있었다. 코보가 초등학교 학생일 때는 그런 가게들을 이용했다. 아직 어렸기 때문이었다. 숙제도 해야 하고 할머니 다리도 주물러야 하고 등등 바쁜 탓이기도 했다.

이젠 어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할아버지의 나이가 열세 살이라고 했으니 결혼을 해도 될 만한 나이였다. 숙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 일도 없었다. 사흘에 한 번, 한 시간 삼십 분 정도만 투자하면 운동도 하고 구경도 하고 장보는 돈도 아낄 수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힘껏 오 분 정도 달리면 답답한 동네 골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동네를 벗어나면 금방 논이 나오고, 밭이 나오고, 시냇물이 나왔다. 물이 가난하게 잴잴 흐르는 시내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갑자기 방향을 틀고 삼 분 정도 다시 있는 힘껏 달리면 하루에 네 번 기차가 지나가는 철도가 나왔다.

철도에 올라서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나면 저 멀리 아득하게 소실점이 보였다. 이 소실점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노라면 온갖 풀벌레와 새소리가 음악처럼 귀를 쓰다듬어 주었다.

 

초아가 있을 때는 둘이서 손잡고 서로를 지탱해 주며 미끄러운 레일 위를 걸었다. 손을 놓으면 금방 미끄러져서 침목 위로 떨어지기 때문에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초아가 평범한 학교는 시시하다고 멀리 떠나버린 뒤로 코보는 미끄러운 레일이 아닌 그 가운데 침목 위를 걸어야 했다. 레일 위를 걸을 때의 짜릿짜릿한 긴장감 대신, 침목 위에서는 온갖 풀벌레와 새소리가 들렸다. 눈을 아주 조금만 뜨고 그렇게 한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와글와글 요란한 역전시장이었다.

 

도깨비시장이라고도 불리는 역전시장의 주인은 대개 배포가 작은 할머니들이었다. 배포가 작다 보니 파는 물건도 조금씩이었다. 자반고등어를 팔아도 백 마리 이하였고, 야채를 팔아도 보자기 한 개나 함지박 하나에 들어갈 정도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들 마음은 하늘처럼 높고 넓었다. 어떤 날은 장사할 기분이 안 난다는 이유로 이천 원 받아야 할 것을 단돈 오백 원에 주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정다운 친구를 십 년 만에 만났다는 이유로 팔던 물건을 아주 귀찮아하며 공짜로 주기도 했다.

 

--얘 코보야. 나 좀 봐줘, ? 우리 좀 봐줘.

 

역전시장에 도착해서 열 걸음도 채 걷지 않았을 때였다. 팬티 한 장에 천 원, 브래지어 한 장에 이천 원, 양말 한 켤레에 오백 원, 등등 소리를 목 놓아 질러대는 아저씨 앞을 지나는데 어디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여자애의 목소리였다. 코보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부를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 생각하고 다시 걸으려 하는데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남자애의 목소리였다.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소리도 계속 들렸다.

 

--여기 좀 봐줘. ? 여기 좀 봐줘.

 

이게 뭐지? 나도 할머니처럼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 건가?

코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머니가 작년에 한동안 이명증이라는 것에 걸려 잠도 못 주무시고 고생한 적이 있었다. 다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가는 거야? 너무 해. 제발 나 좀 데려가줘 응?

 

아이 씨이, 이게 뭐야?”

코보는 투덜대며 고개를 홱 돌렸다. 이어서 몸을 돌렸다. 그때 오리 새끼가 눈에 띠었다. 천 원짜리 팬티를 파는 아저씨의 손수레 옆으로 작은 할머니가 그림처럼 붙어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상자 안에 새끼 오리 다섯 마리가 넓적한 부리를 밖으로 내놓고 노래를 부르듯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코보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오리의 작고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저도 모르게 한 마디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나 불렀지?”

 

그 순간 오리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스무 마리 가져와서 다 팔고 이것 다섯 남았다. 만원만 주련? 만원이면 공짜지 공짜. 그러엄 공짜고 말고. 한 마리에 사천 원씩 팔았거든.”

 

할머니가 두 개밖에 안 남은 앞니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합죽이 웃고 있었다. 코보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다가, 오리들을 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다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얼른 사 줘.

뒤를 이어 남자애의 목소리가 소곤거렸다.

 

--네가 안 사주면 우린 두 달 뒤에 오리탕이 된단다.

다시 여자애의 애절하고 절박한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석 달 뒤엔 오리로스가 되고 말 거야. 얼른 사 줘, ?

와아, 이거 말하는 오리다. 대박이다.

 

코보는 속으로 감격했다. 감격한 소리를 누가 들을까봐 겁이 났다. 이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재빨리 돈 만원을 꺼내서 할머니의 손에 건네고 등에 맨 망태기를 내렸다. 망태기 안에 오리 다섯 마리가 담긴 상자를 집어넣고 다시 등에 매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시끄럽게 떠들던 오리들이 아주 조용해졌다.

새끼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