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온 아이가 떠나간 뒤에(3)
“우리는 여태 뭐했지?”
산부인과 병원을 다녀온 지 사흘을 넘기고 나흘째 되던 날 밤이었다. 해서는 안 될 말이 여자의 입을 기어이 통과하고 말았다. 말을 하는 순간에 여자는 후회하고 있었지만, 도로 주워 담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주워 담기는커녕 그와 연관된 후속 발언들이 이제야 때를 만났다는 듯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여자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서 한참이나 눈만 끔뻑거리고 있어야 했다. 함께 살아오는 동안 한 번이라도 그와 유사한 발언이 여자의 입에서 나왔다면 얼른 이해할 수라도 있었겠지만, 그런 사례가 전무하다 보니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도 못 듣고, 그 표정을 보면서도 못 보는 청맹과니가 돼버리고 있었다. 여자의 입에서 한층 더 강경하게 ‘무엇으로 어떻게 아이를 키워?’ 하는 말이 폭탄 터지듯 튀어 나왔을 때에야 남자는 비로소 연애 시절을 포함한 결혼 초기의 꿈과는 전혀 다른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옛말에나 의지해서 아이를 낳겠다고 아이를 기다려온 것은 아니었다 해도,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싶다는 소망 하나를 빼고 나면 태어날 아이를 위해 준비해놓은 물질적인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이를 돈으로 키울 생각은 아예 하지를 말자, 꿈을 먹고 자란 아이가 훨씬 튼튼하고 지혜로울 수도 있다, 하는 이야기를 틈만 나면 주고받고 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자였고 남자였으니까. 그래서 텔레비전 출연 제의가 왔을 때도 아무 주저나 망설임도 없이 다만 하나 예술을 하고 싶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런데 뭐가 어떻게 돼버린 것인가?
남자는 일단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자의 지나치게 경직된 표정이 자칫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뭔가 대폭발이 일어날 것 같기도 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돈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부부로 살지는 말자고, 그런 요지의 결혼서약서 문안을 작성해놓고 엄숙한 표정으로 동의를 구하던 때의 여자를 남자는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십삼 년도 더 지난 시절의, 어쩌면 치기어린 판단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서약서 한 장이 당면한 현실에 무슨 지침이 되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때는 이랬는데 지금은 왜 이러느냐고 나무랄 것인가?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 몰린 남자는 결국 “인간이란 둘이서도 가끔은 외로울 수 있다고, 그래서 아이가 찾아와 준 것인데 그 아이를 어떻게, 어떻게 하려고 그럼?”하고 겨우 한 마디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웃었다. 잠깐, 언뜻, 여자의 얼굴에 머물다 떠난 그것은 웃음 본연의 웃음은 아니었다. 보는 사람의 내면을 일시적으로 캄캄하게 색칠해 버리는, 냉소라는 이름의,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며 정신 차렷, 소리라도 질러야만 할 것 같은 웃음이 여자의 얼굴을 차지하는 순간 남자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혼돈이라든가 혼란 같은 책임감 없는 이름을 붙여야만 하는,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누구도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해서도 안 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남자는 어지러웠고, 여자는 배가 아팠다. 그리고 그것을 보았다. 찾아온 아이가 떠난 뒤의, 떠나 버리면서 남겨놓은 붉은 흔적을 보고서야 여자는 깜빡 정신이 돌아왔다.
“노산에 임신초기의 과도한 스트레스는 독약인데, 아 이것 참…….”
진단을 마치고 중얼거리는 의사의 난감한 표정을 보면서 여자는 생각했다. 이제 끝났다. 다음 일은 무엇이지? 내가 죽어야 하나?
혼란에 빠진 여자와는 달리 남자의 의식은 아주 명료해져 있었다. 연극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돈을 벌어야겠다. 몸을 바들바들 떠는 여자를 부축해서 병원을 나올 때 남자는 맹세했다. 하지만 맹세의 유효기간은 이틀이 채 안 되었다. 몇푼 안 되는 몸값이나마 인력 시장에 자신을 내놓은 지 하루 만에 남자의 맹세는 바뀌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말자. 오늘의 불행을 불행으로 방치할 게 아니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활용하자. 그러면 어떻게? 남자는 자신이 생각해낸 그 ‘어떻게’에 대해 여자와 의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는 아직 울어야 할 시간이 조금은 더 필요했다. 남자에게 공개하고 싶은 눈물은 아니었다. 남자가 없는 데서 혼자 몰래 울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남자가 있는 데서 남자가 모르게 흘리는 눈물이 여자에게는 필요했다. 가난이 먼 과거의 남의 나라 일처럼 여겨지던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자기 자신이 가난하면서도 가난한 줄을 몰랐던 시절은 얼마나 많은 희망이 별처럼 가슴에서 반짝였던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 해도, 굳이 부자를 선망하거나 좇아갈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삶은 그 자체가 희망이었다. 사글세 보증금이 모자라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이런 것쯤은 인생에서 모래 한 알쯤의 장애도 안 된다고 가볍게 치부해버릴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고방식이 일종의 기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오다가 돌아서 가버린 아이가 그것을 일깨워준 것인가? 아니면 봐야 할 무엇인가를 아직도 못 보고 있는 것인가.
봐야 할 무엇, 그게 뭐지?
여자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뚝 떨어졌다. 여자는 떨어지는 눈물이 남자의 머리카락에 도착하기 전에 얼른 손등으로 받아서 자신의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남자의 머리카락에 자신의 눈물이 더 이상 닿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가. 순간 그녀의 입이 열렸다.
“미안해, 너무 미안해. 내가 잠시 뭔가에 씌웠었나 봐.”
그녀는 우는 소리가 아닌, 똑똑한 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은 두 팔에서 힘이 사르르 빠져 나갔다. 이어서 남자의 머리가 여자의 품을 벗어났다.
“밥 먹자, 배고파 죽겠다.”
남자는 정말로 곧 죽을 것처럼 우는 소리로 말했다.
“응? 그래, 그래, 밥 먹자. 미안해. 너무 늦었지?”
여자는 남자의 허벅지에서 가볍게 훌쩍 뛰어내렸다. 여자의 무게를 덜어낸 남자의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남자는 두 손으로 허벅지를 마구 문질러대다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여자는 졸아들다 못해 거의 타 들어가고 있는 연탄난로 위의 된장찌개 냄비 뚜껑을 열어놓고 아이 참, 아이 참, 소리를 연발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냥 고추장에 비벼먹지 뭐.”
“아니야, 자기 아까 미역 사 왔지? 그거 끓여 먹자.”
“아, 미역, 그거 있잖아. 쇠고기를 못 사왔거든. 그러니까 국은 끓이지 말고 오늘은 그냥, 생미역을 먹을까? 쇠고기도 없는 미역국이란, 아, 음, 그런 그림은 쫌 그렇잖아.”
“그래, 초고추장에 찍어서.”
먹을 수도 없는 된장찌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속에서 두 사람은 부지런히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물에 불린 미역을 새물에 헹궈낸 다음 초고추장을 만들었다. 여자는 공기에 밥을 푼 다음 썰어놓은 오이장아찌를 접시에 담았다. 두 사람 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밥상을 다 차린 뒤에도 두 사람은 마주앉기는 했지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는 않고 고개를 반쯤 수그린 채로 음, 음, 맛있겠다 어쩌고 한 마디씩 중얼거리며 숟가락을 들었다.
“우리 있지.”
밥을 각자 다서여섯 숟가락 정도 먹었을 즈음 여자가 고개를 반쯤 숙인 자세로 다소 명랑한 소리를 냈다.
“아까 당신 무릎에 앉았을 때 문득 생각해낸 건데 있지.”
“응?”
남자는 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차마 여자를 정면으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잠시 보다가 그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자는 몽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몽골 초원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모스크바로 이동한다는, 거기서부터 유라시아 기행을 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방금 전에 했었다는 여자의 이야기를 몽롱한 시선으로 꿈을 꾸듯이 듣고 있던 남자는 갑자기 동작정지 상태로 접어들었다. 우두커니, 멍하니 앉아 있는 남자의 무거운 기운에 여자는 그만 기가 죽어버린 것처럼 말문을 닫고 고개를 더욱 깊이 수그리며 다시 밥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거 내 생각인데?”
조금은 들뜬 남자의 목소리가 여자의 고개를 번쩍 들게 했다.
“아까 미역 사면서 문득 우리의 옛날 약속이 생각나서 말이지. 그 왜 신혼여행을 포기하면서 했던 약속 있었잖아. 그게 오늘 문득 생각나서, 그래서 이번에 아예 그때 못 이룬 꿈을 이뤄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
“어머 그래? 신기하네.”
“신기하긴. 당연한 거지.”
남자는 자기를 보고 있는 여자의 눈을 보았다.
“그런가?”
두 사람은 비로소 상대를 명료하게 의식했다. 여자는 남자를 보고, 남자는 여자를 보면서, 아직도 남아 있는 눈물의 흔적이 민망해서 피식, 소리가 나게 한 번씩 웃고는 도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4
다음 날 오후 두 시 조금 넘어서 여자와 남자는 극단 단장과 연출자를 앞세우고 소극장 연습실로 들어섰다. 손을 놓고 어수선한 분위기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단원들은 갑자기 활기찬 소리를 내며 벌떡벌떡 일어섰다. 침통한 표정에 입을 꾹 다문 단장이 두 손을 높이 들어서 그물을 끌어당기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까이 불러 모았다. 사람들이 다 모인 뒤에도 단장은 한참을 더 극중의 배우처럼 무겁게 말없이 서 있다가 이윽고 준비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가슴이 지나치게 무거워져 있었던 탓이었을까. 단장의 이야기가 끝나기는커녕 아직 본론으로 접어들기도 전에 흥분한 단원들의 이구동성이 시작되었다.
“여행?”
“여행?”
“유라시아 기행이 뭐 어쩐다고?”
“아니 이게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람?”
“오호, 그동안 아무도 몰래 돈깨나 벌어 두었던 모양이지?”
“그러고 보니 엄청난 부자들이었네, 응?”
단장은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버렸다. 이에 연출자가 손나팔을 만들어서 입에 대고 조용, 조용, 하고 속삭이듯이 외치기 시작했지만 단원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해가 깊어질 것을 우려한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두 손을 들고 흔들어 보이며 단장을 젖히고 앞으로 나섰다. 간밤에 한숨도 안자고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던 여자와 남자는 감기까지 걸려 목이 푹 잠겨 있었다. 남자는 아예 한 마디도 못하고 어어, 소리만 내고 있었고, 그나마 상태가 좋은 여자가 목이 쇤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여행은 원래 돈으로 떠나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과 열정으로 시작하는 게 여행이라는 것쯤 여러분들도 다 아시지 않나요. 그래도 해명이 필요하다면, 음, 우리는 우리의 사글세방 보증금을 빼기로 했다고,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러면 지금 흥분해 버린 여러분들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킬 수 있을까요?”
물음표 부분에서 여자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코를 깊이 들이마셨다. 뒤로 밀려났던 단장이 여자를 젖히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우리의 주인공들에게 아이가 찾아왔었답니다. 그런데 찾아온 아이가 그만 돌아가고 말았답니다. 결정적인 원인은 그놈의 원수놈의 돈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알량한 현상유지나 꾀하자고 우리의 주인공들을 붙잡아둘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난관을 재충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박수로 응원해 줍시다. 우리가 그런 정도의 가슴조차 지니지를 못한다면, 이 살벌한 글로벌 시대에 무슨 에너지로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깨어날 수 있겠습니까.”
단장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단원들은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동작정지 상태로 접어들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에, 연출자가 박수를 치며 앞으로 나서긴 했지만, 아무도 그에 호응해서 박수를 치거나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