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27)

두꺼비네 맹꽁이 2021. 3. 3. 09:23

허공에 집을 짓고

 

흔해빠진 탱화 한 장 걸려 있지 않은, 벽지 대신 송판으로 벽을 짜 맞추고 바닥에는 방석 두 개만 달랑 놓여 있을 뿐인 다섯 평 남짓한 크기의 응진전 안에서 우리는 문을 닫고 마주앉았다.

그렇게 앉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생과 사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도 같았다. 흔히들 세상이라고 말하는 이 풍진 속세에서는 이제 달리 배우고 따를 만한 법도가 아무런 것도 없지 않겠는가 하는 착각에도 빠졌다.

 

그러나 법운이 나를 불러들인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던가 보았다. 나는 법운이 내게 뭔가 요긴한 것을, 이를테면 온갖 번뇌망상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어떤 기법 같은 것을 전수해 주지나 않을까 해서 내심 긴장하고 있었지만 법운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내 기억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나는 아까 커피숍에서 이미 앞으로의 내 행로에 대한 대강을 말해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앞으로 계속 살아도 괜찮은지, 아니면 곧장 죽어 버리는 게 나은지, 살든 죽든 어느 쪽으로든 그 이유를 밝혀보고 싶다고, 나는 아마 그렇게 내 자신을 발가벗겨서 법운에게 보여주었던 모양이었다. 법운은 월남에서 총으로 사람을 죽여본 전력이 있는 사람답게 위협적인 침묵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자아 보자. 그래서, 그래서 네놈이 소설을 써보겠다고, 소설을?”

.”

네놈이 도둑질을 몇 번 해보더니만 이제는 사람의 정신까지 훔치려 하는구나. 사랑을 훔치려 하고 있어. 그래, 그것을 훔쳐서 뭐에 쓸 작정이던고? 말해봐라, 말해봐, 어서.”

 

저는 사람의 정신을 훔치려는 게 아니라 제 자신의 정신을 밝혀보고 싶은 겁니다. 어쩌면 소설이 그 일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말입니다.”

에끼, , 차라리 점술이나 배워봐라. 점술 그거 배워두면 먹고살기에 어렵지는 않을 게다. 게다가 그 짓을 하고 있으면 이쁘고 돈도 많은 여자들이 제법 줄을 지어 찾아오기도 한다. 이쁘고 돈 많은 젊은 여자들이 어째서 점쟁이를 찾아오느냐.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쁘고 젊은 데다가 돈이 많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점쟁이를 찾아나서는 거야. 왜냐하면 세상이 온통 불안하거든. 그런 즉 점술을 익혀서 방 한 칸 차지하고 앉기만 하면 금방 부자도 되고 색시도 얻고 그런 수가 생긴다 이거다, 알겠느냐. 그러니 소설이다 뭐다 그따위 허공에 궁전 짓는 생각일랑 떨쳐 버리고 점술이나 익혀라.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지, 그럼.”

 

저는 농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나는 이놈아 농으로다 그런 말씀 지껄인 줄 아느냐.”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아니면?”

살아가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아니면?”

색시를 구하는 문제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래, 그것은 당연히 아니겠지. 네놈 주제에 소설까지 쓴다고 자빠져 있으면 어느 미친년이 얼굴이나 보여주겠느냐.”

먹고살 만한 일을 찾을 수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마음먹고 하기로 하면 할 만한 일은 있고?”

아니,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헛소리를 해, 이놈아. 네놈은 허공에다 궁전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니까 저는, 말하자면 저는 좀 긴 유서를 쓰고자 하는 겁니다. 소설을 쓰듯이 유서를 쓰고, 아니 어쩌면 유서를 쓰듯이 소설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런 뒤에…….”

죽든 살든 결판을 짓겠다?”

.”

에끼 이 비겁한 놈. 살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강해서 소설이라도 써 보기로 했다고 왜 똑바르게 말하지 못하고 거짓을 주워섬기느냐, 이놈아.”

 

제 생각으로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사는 것이든 죽는 것이든, 그 두 가지의 차이는 별거 없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든 죽는 것이든,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도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리고 또, 선택이 끝난 뒤에도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따로 필요할 것 같고, 그래서, 죽는 일이든 사는 일이든 어쨌든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도 사는 것에 뒤지지 않게 큰 일일 테니 말입니다.”

허허허 허허허 어허허헛, 이놈이 땡초를 데리고 궤변을 농하자는 것이로구나 이거, ? 에끼 이 천하에 날도둑놈 같으니. 네놈은 지금 죽어서도 살아 있고 싶어 환장을 한 것이로다. 고깃덩어리는 시커멓게 썩어도 혼은 말갛게 남아서 세상의 처음과 끝을 두루 돌아서 네놈의 것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미친 거란 말이다, 이 도둑놈 날강도 같은 놈아.”

 

법운은 미친 듯이 웃어젖히다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하지만 나는 하나도 우습지가 않고, 우습기는커녕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머릿속이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법운이 무심하게 내뱉은 말 한 마디를 나는 놓치지 않고 바싹 다가앉았다.

죽어서도 살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그 말씀은 제가 죽기 전에, 제 자신이 죽은 뒤에도 제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가 되는데요. 그렇다면 결국, 소설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것이 아니면, 그러면 네놈은 소설이란 것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저는, 제 생각으로는, 소설이란 것은, 결핍이 많은 사람이 세상에 대해서 쓰는 유서가 아니겠는가 싶은데요. 평생을 바쳐서 써야만 하는, 그 평생이 하루가 됐든 삼십 년이 됐든 시간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이 세상에서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린 모든 것들에 대해서, 또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또는 죽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죽음과의 친교를 갈구하고 있거나 혹은 죽음이 강제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한 번쯤을 배반을 해보자고 속삭여 보고, 심지어는 나 자신의 죽음에의 욕구에마저 배반의 창을 던져 그 하찮은 욕망을 거부하게 하고, 박제가 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차라리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들어 피를 흘리다가 쓰러지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서 또 한 번 강하게 거부하게 하고, 그렇게 살아 있다는, 살아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분명하게 세워보고, 그런 뒤에 비로소, 비로소…….”

 

비로소 여한이 없이 죽는 것이다?”

.”

성문독각(聲聞獨覺)이로다, 성문독각이야. 네놈이 지금 도둑질에 집착한 나머지 무엇을 도둑질하고자 하는지조차 모르는 잔약한 도둑질에 미쳐 있는 게로구나. 얘야, 발우야, 너 그러지 말고 사랑이나 한 번 도둑질해 봐라.”

사랑…….”

 

나는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가 잘 안 되어, 법운의 날카로운 시선에다 내 눈을 맞춘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묵, 침묵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이 가령 형태를 갖고 움직이는 물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서 어디까지 얼마만큼의 속도로 우리의 사이를 흘러갔을까. 찰나가 반복되고, 억겁이 또한 반복되어, 내 육신이 수천 수만 아니 수억 차례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같고 눈꺼풀 한 번 가볍게 깜빡거리다가 말았을 뿐인 것도 같았다. 법운과 나는 그렇게, 알 수 없는 시간의 어디쯤에서인가 허공에 시선을 걸어놓은 채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을 몰라?”

 

이윽고 그 무엇인가가 온 모양이었다. 그때쯤 나는 더 이상 눈에 힘을 주고 있을 수가 없었지만, 법운은 오히려 더욱 강렬해진 눈빛으로 마치 내 육체의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이 집요하게 주시한 채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말해라. 사랑을 모르느냐.”

아니 뭐, 모른다기보다는…….”

 

나는 그 무엇인가의 압력에 의해,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법운은 그것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똑바르게 말해라. 아느냐 모르느냐.”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해 보거라. 사랑이 무엇이냐. 말해라, 어서. 말해봐.”

사랑을, 그러니까 사랑을, 그것을 어떻게 입으로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도둑놈을 보겠나. 사랑은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니, 어허, 임기응변에도 능한 놈이로고, 하긴 네까짓 놈이 사랑을 알 리가 없지.”

아닙니다. 압니다.”

이놈아, 네놈 눈에는 이미 모릅니다. 그렇게 써 있어. 그러니까 네놈은 아직 너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녀석이라는 게야.”

죄송합니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아야 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스님께서 아시면 저도 좀 알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이 정히 진정이렷다?”

 

나는 엎드려 절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더 이상은 법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어험, 좋다, 좋아. 받아주기로 하지. 너 아까 내 딸아이 보지 않았더냐. 어떻더냐. 이쁘고 섹시하지 않더냐. 소설이다 뭐다 시끄러운 소리는 일단 닥쳐두고 우선 그 아이에게 이름이나 하나 줘 봐라. 어쩔 테냐.”

이름이요?”

그래. 이름이다. 그 녀석이 요새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이 지낸 지가 얼추 이태 가까이 됐지 아마?”

무슨 그런 말씀을…….”

너는 아직도 내가 농이나 지껄인다고 생각하느냐?”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로 법운의 태도는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기조차 했다. 그런데 이름이라니, 이름이 없는 여자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