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22)

두꺼비네 맹꽁이 2021. 2. 24. 09:41

죽은 듯이 살아가는 여자들

 

나를 죽여줘요, 나를 죽여줘.

 

바람이었을까. 죽은 나의 정혼녀, 그녀, 바람의 영혼이 아직도 정처를 구하지 못하고 민들레 꽃씨처럼 날아다니며 소나무 가지에 얹히는 바람의 힘을 빌어 그런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녀는 시신을 잘 수습해서 잘 묻어주고 천도제까지 지내주었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그래, 그녀는 아닐 거야.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 대다가 담배를 꺼내 들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만 했을 뿐 거의 꺼내본 적이 없는, 언제 사서 가지고 다녔는지조차 기억에 없는 아주 오래된 담배였다. 하지만 라이터가 없어 담배를 피울 수는 없었다. 나는 담배를 손에 든 채 누님을 보았다.

 

그런데 바람은, 잘 수습해서 잘 묻어준 게 맞는 거지?”

그래, 맞아.”

 

누님은 더 이상 이야기를 끌어가지 않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렸다. 말이 길어지면 내가 혹시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하는 마음에서이겠지. 아니, 어쩌면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얘기를 계속해도 좋은지 나쁜지 읽어보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누님이 딱히 고맙지도 않았지만, 싫지도 않았다.

바람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나는 바람이 죽기 전이나 죽은 뒤에나 그녀에 대해서 거의 관심도 없었거니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나를 긴장하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예전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내게 무한한 흥미와 고통을 주지만, 죽어버린 사람에 내게 주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추억이라는 이름의 부피 없는 감상과 그리고 박제화된 약간의 이미지뿐이었다. 어쩔 것인가. 게다가 나는 바람이 나의 정혼녀로 결정이 된 뒤에도 그녀에게보다는 혜수에게 더 많은 관심을 투자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런데 이제 와서 어쩔 것인가 말이다.

 

그런데 너어, 너 말이야.”

누님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가볍게 입을 열다가는 어마, 소리와 함께 체중을 내게로 실어왔다. 칡넝쿨은 생명력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 칡넝쿨로 존재하고 있었다. 죽었으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강한 섬유질을 가진 그것들이 무시로 발을 걸고 매달리는 탓에 우리는 자주 비틀거려야 했다.

 

그렇다 해도 누님의 그것은 좀 심하다 싶은 느낌이 있었다. 그랬다. 툭하면 내 쪽으로 쓰러지는 누님의 몸짓에는 숨길 수 없는 과장이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을 오롯이 읽어낼 수 있다는 듯이, 손으로 책갈피를 넘기듯이 내 어깨나 혹은 옆구리를 잡고 자신의 체중을 실어 왔다.

누님이 그렇게 자신을 의지해 올 때마다 나는 누님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조용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누님은 신기하리만치 온순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그런 자세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좋겠다는 듯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얼이 빠져버린 사람처럼 우두커니 선 채로 내 얼굴을 보는 누님의 그 눈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바람이 쌀쌀해서인지, 부끄러움 탓인지 누님의 얼굴은 연한 빛깔의 여린 채송화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고, 나는 그 여린 이미지를 견뎌낼 수가 없는 탓으로 오래 서 있지를 못하고 금방 외면해 버리곤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왜 누님을 데리고 이 칡넝쿨 투성이의 아무도 없는 동산을 오르고 있는 것인가? 거부해야만 하는 옛 추억의 편린들이, 피해야만 하는 진실의 희미한 실마리 같은 것들이 나를 서서히 압박해 오고 있다는 느낌인 채로 나는 또 한 번 머리를 회회 내둘렀다.

 

왜 그래, 자꾸?”

? 아니 그냥, 뒷골이 땅겨서, 그런데 아까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거야?”

으응, 그거. 네가 우리 집에도 한 번 와 줬으면 좋겠다고,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정말 넌 왜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와? 너 여기 내려온 지 두 달도 넘었다는 거, 너 그거 알아? 나는 너 보려고 사흘에 한 번씩은 오는데, 그런데 너는 한 번도 안 왔잖아.”

알았어. 이제 갈 거야. 갈게.”

 

가겠다고, 무심히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나자마자 나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결심을 그렇게 한다 해도 나는 결국 누님의 집을 방문하게 될 것이었다.

내가 죽지 않고 살게 된다면, 어차피 삶을 선택하기로 한 이상 살아야 할 보다 견고한 이유와 그리고 긴장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머잖은 장래에 반드시 누님의 집에 들러 거기에만 있는 무엇인가를, 이를테면 누님의 선한 마음씨 같은 것을 훔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누님은, 내가 자신의 무엇인가를 그렇게 훔쳐가 주기를 은연중 고대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얼른 이곳에서 떠나가 주기를, 그 편이 내게 훨씬 이로우니까 그렇게 해주기를, 누님은 차마 입으로는 말을 못하고 내심으로만 빌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네가 요새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괴로워하고 있는지, 사실 잘은 모르지만 대충은 알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부탁 하나 할게. 이제 그만해. 부탁이야. 제발, 어쩔 수 없는 일도 세상에는 더러 있는 거야. 우리는 어머니를 이해해야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알아. 알기 때문에 더욱더 어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는 거야. 용서하기 어려운 거야, 내 입장은 그런 거야. 죽겠다고 온 내가 왜 이렇게 죽지도 못하고 있는지를, 누님도 조금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뱉어 내듯이 빠르게 말해 버렸다. 그리고는 은선암 창건주의 비석 옆으로 몸뚱이를 내던지듯이 거칠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기서 앞으로 스무 걸음만 나아가면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그리고 뒤쪽으로 십여 분쯤 가시덩굴 사이를 뚫고 나아가면 대웅전이 내려다보이는 벼락바위가 나왔다.

말하자면 그곳은 숲 속으로 우뚝 솟아오른 일종의 섬 같은 곳이었다. 바다와 갈대, 그리고 강물처럼 푸른 숲이며 안개들이 멀리 바라보는 거대한 풍경화처럼 한눈에 보이는 그런 섬이었다. 때로는 절벽 아래 소나무를 에워싸고 돌다가 흩어지는 구름 같은 안개의 잔영이 살아서 움직이기도 하는, 여름의 장마철에는 이제 막 사람이 빠져나간 뒤의 구겨진 이부자리 같은 구름이 정말로 아래로 내려다보이기도 하는 그런 옛 추억의 아련한 사무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방금 전에 무슨 말을 뱉아 버렸는지 거의 의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다만, 깎아지른 절벽의 저 아래 구름 속으로 마치 다이빙을 하듯이 떨어져 들어가고 있는, 한순간 빛을 발하다가 사라지는 유성처럼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잠시 드러냈다가 소멸의 수순을 밟고 있는 돌멩이 하나를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니 그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바람에 떨어진 꽃이고, 나뭇잎이고, 칡넝쿨에 목이 감긴 채로 소나무 가지에서 아슬하게 흔들리는 정혼녀의 얼굴인가 하면 그녀의 찢어진 하얀 고무신짝이기도 했다.

 

, 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 안 돼, 안 돼.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다니.”

누님은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온다는 듯 한동안 내 옆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는 탈진해 버린 사람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비석에 의지해서 앉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어딘가가 느닷없이 꺾어져서 무너져 내리듯이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제서야 나는 아차, 싶었지만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누님에게나 내게나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숨길 수는 있어도 거부할 수는 없는, 진실은 진실이되, 그것은 사실 무서운 진실이기는 했다. 발설해서는 차마 안 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세상에는 그런 진실도 있다는 것을, 누님은 그런 식으로 내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 생각하면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싶기도 했다. 아니, 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누님을 굳이 불러낸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나를 속이고, 혹은 본심을 모르는 체 해야만 할 정도로 그 문제는 사실 복잡하고 어려웠다.

아이들에 관한 어머니의 생각이나, 그들을 보호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물론 내가 뭐라고 간섭하고 나설만한 일이 아니기는 했다. 거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 미묘한 실망감과 배신감의 무게가 너무 컸다. 내가 아무리 어머니의 편에서 어머니를 옹호하고 응원하고 싶어 한다 해도, 내 안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시시각각 치고 올라오는 그 어떤 절망적인 목소리를 나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아 무섭게도 어머니는 끝내 사랑과 자유를 포기해 버리셨구나, 포기하고 아예 세상에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고, 잊어버리기로 작심하신 거야.

그래, 아마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너무도 허약해져 있다는, 대단히 엄격하고 그래서 얼핏 강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자세야말로 종이호랑이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알면서도 차마 인정하기 어려운 그런 무서운 진실이 내 안에서 나를 고문하고 있었을 것이다.

 

너는 네가 어머니를 용서하고 안 하고, 아니 그보다도 네가 어머니를 그런 식으로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사람이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야.”

나도 알아. 내가 어머니에 대해서 감히 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 그것쯤은 나도 알아. 그래서 더욱 화가 나고, 견디기가 어려운 거야. 누님은 아무렇지도 않아? 송화랑 채연이랑, 심지어는 그 어린 난이까지도, 잘 길들여진 개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렇지가 않아?”

넌 어쩌면 그렇게도 말을 함부로 해? 개라니, 개가 뭐야, 세상에.”

 

누님은 금방이라도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누님은 이미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밖으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로서는 어차피 내디딘 걸음이었다. 울 바에는 크게 울어버리는 편이 좋았다.

 

누님은 이걸 알아야 해.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닌 거야. 우리도 이젠 철이 들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게 아까 얘기했잖아. 어머니를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고, 어머닌들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러시겠어. 아이들에 대해 책임감을 얼마나 크게 느꼈으면 그러시겠느냔 말이야. 너도 한 번 생각해봐. 교육이란 게 뭐 다른 거니, 다른 거야?”

내 생각은 누님과는 달라. 달라도 많이 달라. 어머니는 지금 뭔가, 말하자면 신() 같은 것이 되려하고 있는 거야. 사람을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신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 거라고. 누님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사람이 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넌 왜 꼭 그렇게만 생각해? 그게 뭐 어머니 당신을 위해서인가. 결국은 송화나 채연이 걔네들 장래를 위해서 어머니도 고생을 하시는 거잖아. 넌 어머니가 요 몇 년 동안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를 몰라서 그래. 몰라서 그렇게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고 있는 거야.”

누님도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돼.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야. 누구도 함부로 타인의 앞날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야. 왜 오늘을 살면서 오늘은 생각하지 않고 내일만 준비해야 해? 그렇게 무자비하게 폭력적으로 내일을 준비하면 내일이 생각했던 것처럼 되어지나?”

 

네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네가 그만큼 세상을 허무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야. 그러므로 넌 어머니에 대해 이렇쿵 저렇쿵 말을 할 자격도 없어. 알아? 네가 세상을 사랑한다면, 누가 너에게 그런 말을 하라고 시켜도 너는 아마 그런 얘기를 입에 담을 수 없을 거야.”

누님은 그러니까 끝내 오늘보다는 내일이 중요하다는 거야? 누님은 우리가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좋아, 그렇다고 해. 오늘보다는 내일이 삼천 배는 더 중요하다고 치자 이거야.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의 방법은 비겁해. 어머니는 지금 송화나 채연이 그리고 난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구실 아래 어머니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가 지금 한없이 약해지고, 그리고 비겁해졌다는 증거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비겁한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를 비겁하다고 말하는 사람일 거야, 아마. 어머니를 비겁하다고 말하는 너, ? 그런 너는 뭐야. 그러고 보니 너 참, 죽으려고 왔다고 했었지? 그랬지? 그런데 두 달이 넘었는데도 왜 아직까지 안 죽고 살아 있어? 이유가 뭐야, 안 죽는 이유가 뭐야. 내가 같이 죽어줄까. 내가 같이 죽어 주기를 바라는 거야? 아니면, 아니면 사람들이 모두 자살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아직 자살을 미루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너랑 같이 자살을 해주는 그날을,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지금? ?”

 

누님은 금방 숨이라도 넘어갈 듯이 시끄러운 소리로 마치 알을 낳아놓고 뱀에게 위협을 당하는 때까치처럼 정신없이 쏘아붙이고 있었다. 그것은 누님으로서도 아마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일종의 마지막 진실 같은 것임이 분명했다. 그랬다. 나는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가슴에 품어두고 있었지만, 차마 발설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가끔 들여다보며 한숨을 지었던 그것을 누님은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 그런 식으로 마치 부부싸움 뒤에 살림을 집어던지듯이 마지막 있는 정열을 다해 풀어놓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내가 알고 싶어 해서 알아진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주인 없는 개처럼 분방하게 살다 보면, 딱히 무엇을 지켜야 할 책임감도 없고, 보호해야 할 그 어떤 의무감도 없이 그냥 심장의 박동소리만을 좇아서 살다 보면, 그렇게 굴러다니다 보면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내 육체의 일부처럼 알아지는 법이었다.

어쨌든 누님의 그런 뜻밖의 모습은 결과적으로 나를 승리자로 만들어 놓았다. 누님의 허약한 모습을 통해서 나는 바야흐로 내가 옳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의 그런 판단이 사실로 진실에 근접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객관적인 진실이야 어떻든 나는 내가 옳았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님이 그때 만일 보다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보다 자신만만하게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나를 나무라고 설득하고자 했었다면, 나는 아마 어머니에 대한 내 견해를 철회하거나 적어도 회의하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누님의 생각에 동화되어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나약한 여자의 관념적인 사치로 무장한 권위의식 외에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안타까워하는 누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나는 누님의 권위에 복종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 나도 모르는 어느 새인가 칡넝쿨을 뜯어 손에 들고 때까치처럼 쏘아붙이고 있는 누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쉴새없이 건드리고 있는 속에서 발갛게 상기된 누님의 얼굴을, 그 참을 수 없이 허약한 육체의 어딘가를, 죽여줘요, 죽여줘, 나를 차라리 죽여줘 제발, 하고 애원하는 듯이 여겨지기도 하는 그 육체의 어딘가를 나는 아마도 칡넝쿨에 매달아서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고 다시는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몸을 떨고 있었을 것이었다.

아아,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뜨겁던 피는 식어가고, 바람은 조금 전의 그 바람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렇게 되었는지, 허망스럽게도 나는 격정적인 광기로 부들부들 떨어대던 조금 전의 내가 아니고, 누님도 또한 때까치 같은 때의 그 누님이 아니었다.

 

시끄러운 소리로 미친 듯이 나를 몰아붙이던 누님은 이제 때가 되어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어진 사람의 눈으로 한동안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한순간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또 한순간은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사람의 체념이 가득한 눈으로 오랜 시간 나를 보다가 하늘을 보다가, 그러다가는 고개를 푹 꺾어버렸다. 고개를 수그린 채 두 손을 치마폭 위에 올려놓고 어깨를 들썩거리는 누님의 그 작은 모습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내 영혼을 간섭하며 나를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