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려던 내가 소녀를 만나(18)
누님에 관하여
해가 이울고 있었다. 떨어지는 태양의 마지막 안간힘과도 같은 처절한 붉은 기운이 마당에 가득한 빨랫줄에 걸려 있었고, 누님은 그 속에서 그림처럼 빨래를 걷어 들이고 있었다.
“너, 너…….”
내가 들어서자 누님은 흰 빨래를 품에 안은 채로 배시시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마중을 나오다 말고 우뚝 멈춰 서서는 이제 막 연록의 이파리를 밀어내기 시작하는 앙상한 감나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너 또, 그때처럼 삽을 들고 왔네, 삽을…….”
“신경 쓰지 마. 난 원래 뭐 하나도 제대로는 못하면서 폼만 잡는 그런 녀석이잖아.”
팔 년만의 만남이었다. 팔 년만의 재회인데도 어제 헤어지고 오늘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역시 어려웠다. 이 친숙하면서도 준엄한 느낌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지? “너 우리 집에 돈 있는 거 죄다 훔쳐갔잖아. 내 돈 내놔. 이 나쁜 자식아. 나쁜 자식, 그지 같은 자식, 도둑놈, 빨리 돈 내놔, 못 내놔.” 누님이 내 멱살을 틀어쥐고 그렇게 악다구니라도 써주면 나는 아마 조금은 더 편안했을 것이다.
“넌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게 하고, 그러는 게 재밌어?”
누님은 똥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바라보면 내가 한없이 무력해져 버리는, 그래서 화가 벌컥 나고 심술스러워지기도 하는 그 눈, 그 눈물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못 본 체 외면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토방으로 올라가서 마루에 엉덩이를 부려놓았다.
“나 방 하나 줘. 방 있지?”
“응? 응. 알았어. 방은 있으니까 걱정 마. 금방 치우고 청소해 놓을게.”
“매부는, 매부는 어디 갔어?”
“응? 으응, 일심암, 거기에 있어.”
“일심암은 왜?”
“거기다 굿당 차렸어. 여긴 너무 시끄럽다고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가끔 몰려와서, 근동 사람들이 거의가 교회를 다니거든.”
누님은 감나무 저편으로 삐죽삐죽 솟아 보이는 첨탑을 가리켰다. 인구 천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면소재지에 뾰족한 첨탑이 둘, 셋, 넷, 마루에 앉아서도 다섯 개가 한눈에 보였다. 앙상한 감나무 가지 사이로 빨갛게 익은 해가 이제 완전히 떨어져 가고 있었다.
“집에 분위기가 어쩐지 좀 이상해졌다 했더니, 매부는 그럼 거기서 여기까지 출퇴근하는 거야? 걸어서?”
“출퇴근은 무슨, 서로 얼굴을 잊어먹지 않을 정도로만 봐. 삼 년 됐어.”
“뭐야, 그러면 누님 지금 과부란 말이야?”
“얘는 말을 해도 꼭, 말을 그렇게 하는 게 재밌어?”
“사실이 그렇잖아. 젊은 여자가 혼자 있으면 그게 생과부지 뭐야. 애도 없이, 아 참, 누님 아직도 애 없지?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누님은 왜 여태까지 애를 안 낳고 있는 거야, 혹시 못 낳는 거야?”
“나도 몰라. 얘는 참 별 걸 다 묻고 있어.”
“매부가 혹시 누님을 사랑하지 않는 거 아냐?”
“사랑?”
“응.”
“난 사랑 충분해. 부족한 거 없어.”
“거짓말 마. 매부 그 자식 혹시 일심암에 여자 두고 있는 거 아냐, 그렇지?”
헛된 관심이다, 헛된 관심이야, 하면서도 나는 그 헛된 관심에 몰입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몰입이라기보다 어쩌면 몰입하고 싶어하는 심사인 것인지도 몰랐다. 누님은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듯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는 피식 웃었다.
“너도 참 퍽이나 심심한가부다. 심심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냄새가 수상해.”
“수상은 무슨,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뭐 어때서?”
“뭐? 남편이란 작자가 애인을 두고 있는데도 그게 뭐 어때서냐고?”
“그러지 마. 화내지 마. 네가 그러면 나 가슴이 아파. 진짜야.”
“뭐, 가슴이 아프다고? 이런 병신, 누님은 왜 그렇게도 병신 같냐, 응?”
“그야 뭐, 병신 같으니까 병신 같겠지. 그런데 병신이 뭐 어때서? 넌 병신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나서는 누님의 눈에서 또 한 차례 눈물이 글썽거렸다. 안타까운 대상을 바라볼 때 저절로 솟아올라 툭 떨어지는 연민의 물방울. 누님은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겠지. 그래서 끌어안고 젖이라도 빨리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같이 슬퍼하고 싶은 것이겠지. 날아가는 새를 갖고 싶다고 슬퍼하는 누이동생을 끌어안고 흐느끼던 때의 어머니처럼, 그렇게 밤새도록 울어주고 싶은 것이겠지.
“말해봐. 넌 병신이 죄라고 생각해?”
“죄는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니지 뭐.”
“왜?”
“왜긴 왜야. 우선 사람들에게 자주 속임을 당하고, 뒤통수를 맞고, 그래서 내가 아프니까, 아프면 병이 되는 거고, 그러니 좋을 게 뭐야.”
“그래도 나는, 내가 누구를 속이는 것보다 속는 게 좋은걸.”
“속이는 것보다 속는 게 낫다고?”
“그러엄.”
누님은 배시시 웃고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서 입을 틀어막고 목이라도 콱 졸라버리고 싶어지는 웃음, 배시시, 하긴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진작에 누님과의 인연을 끊었을 것이다.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 들어가서 한숨 자. 얼굴색이 말이 아니고만. 피곤하지? 자는 동안 너 있을 방 치우고, 밥 하고, 그리고 나서 깨울게.”
“누님은 내가 밉지도 않아?”
“아니, 왜에? 내가 왜 너를 미워해. 얘는 참 별소릴 다 하네. 난 그냥 좋기만 하고만.”
“내가 누님네 돈을 죄다 훔쳐갔었잖아. 팔 년 전에. 그런데도 안 미워?”
“그거야 뭐. 네가 필요해서 가져간 거겠지. 그까짓 돈 좀 가져간 게 왜 미워해야 할 이유가 돼? 그리고 우린 사실 돈 있어봐야 쓸 곳도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참 별나다. 그게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안 좋은 거야, 그런 생각은. 사람의 생각이 각자 다르듯이 살아가는 방법도 각자 다른 거야. 더군다나 돈이란 것은, 그것은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필요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닌 거야. 때문에 돈이란 것은 누가 가지고 있든 잠시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지 절대로 그 사람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야. 너도 이젠 그런 이치를 알아야 해.”
“나 원 참, 아 뭐, 좋아, 그렇다고 쳐. 누님은 그렇다 해도, 그렇지만 매부는 쓸 곳이 있었을 거 아냐. 쓸 곳이 있었기 때문에 벌었을 거 아니냐고, 안 그래? 그런데 그게 사라져 버려서, 그래서 누님을 책망하기도 하고 그랬을 거 아냐. 이제 보니 혹시 그 문제 때문에 누님과 매부가 지금 별거하는 거 아냐?”
“넌 아직도 매부를 잘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그 사람도 돈 쓸 일은 없어. 돈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왜 집에다가 돈을 쌓아둬?”
“좋아하지도 못하고, 쓸 일도 없고, 그렇다고 굿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공짜로 해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니까 생기는 대로 그냥 집에 뒀던 거지 쌓아놓긴 뭘 쌓아놔, 얘도 참…….”
“너도 참 답답하게 꽉 막혔구나, 그런 얘기를 하려다가 만 거지, 지금? 좋아, 그렇다고 쳐. 그런데 누님은 이걸 알아야 해. 누님의 그 바보 같은 태도가 순진한 사람을 도둑놈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걸, 알아야만 해, 알겠어?”
얘기를 하다 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내 곁을 떠나버린 아내가 문득 생각났다. 지금쯤 그녀는 나를 망하게 한 후배의 아내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후배의 말을 도용하고 있었다.
“선배님이 나를 고발하지 않은 까닭에 나는 영원한 도둑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귓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나를 정신이 번쩍 들게 했던 그 말이, 어느새 그렇게 내 안에서 육화되어 내 말인 듯 내 입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님은 내가 그때 후배에게 반응했던 그대로, 그 표정 그대로, 아니 유사하게, 갑자기 얻어맞은 사람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후배도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모르겠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진리인지도 모르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기분을 그때 후배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이야 어떻든, 후배는 그때 제 말을 했겠지만 나는 지금 후배의 말을 도용했거나 최소한 차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누님은, 내가 그때 후배에게 그런 얘기를 듣는 순간에 느꼈던 그런 충격으로 어리둥절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때 후배를 쳐다보며 눈에 독이 오른 칼날을 품고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를 쳐다보는 누님의 눈빛에는 독이 아니라 웃음의 전조가 있었다. 배시시한 그런 웃음의 전조가 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클 수도 있는 거겠지 뭐.”
“뭐라고?”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경험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얘기야. 근데 넌 왜 자꾸 두 번씩 말하게 해?”
누님은 자기가 하는 말에 자신이 없다는 투로 얼른 말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일 뿐이고, 나를 바라보는 그 순정한 눈에는 이미 확신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그 확신의 이면에는 유혹을 하는 듯한 그 배시시한 웃음이 있었고.
그런 차이가 있었군. 누님과 나 사이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차이가 있었군. 하긴 그런 차이를 느낀 것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었다.
오래 전 산비둘기들이 구구거리는 숲에서 고사리를 꺾을 때, 물소리가 맑은 노래처럼 들리는 바위골짜기에서 가재를 잡을 때,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 그녀가 비에 젖은 몸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기어드는 목소리로 나를 오빠라고 불렀을 때, 그때 이미 누님과 나의 높은 간격을 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었다. 다만 그때는 그녀의 깊이와 높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더욱더 그녀를 마치 하인이나 몸종처럼 내게 굴복시키려고 했었다는,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서서히 화가 나고 있었다. 한없이 약해 보이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많은 없다는 충동이, 연하고 보드라운 고사리를 꺾듯이 그것을 꺾어버리고 싶어지는 욕망이, 누님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쳐 그러지를 못하는 내 뒤틀린 심사가 내부에서 끓다가 부글부글 뜨거운 거품이 되어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수성(獸性)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일 길이 없어 보였다. 내 안에 깊숙이 닻을 내려놓고 의기양양 돛폭을 펄럭거리는 수성, 그것을 내가 최초로 알아차린 것은 그 옛날 둥지산에서 고사리를 꺾으면서였다.
이제 막 흙을 밀고 나오는 여리디여린 고사를 꺾을 때의 기분이 어쩌면 그렇게도 뿌듯하고 신이 나던지 나는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문제는 그런 수성의 대척점에 직접적인 살생을 거부하는 또 다른 내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 몰래 구워 먹겠다는 생각으로 잔뜩 잡아놓은 가재를 한 마리도 구워 먹지는 못하고 도로 놔줘버리고 돌아서서 아쉬워하는 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것인가 하면 이것이 아니고 저것인가 하면 저것도 아닌, 뭔가 잔뜩 해놓은 것 같긴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무런 한 것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마는, 그렇다, 아내는 그런 내가 어떤 종자인지에 대해 매우 적절한 해석을 내려준 바 있었다.
“정말 한심해, 왜 그렇게도 우유부단해?”
아내의 그 말은 곧 믿고 의지할 만한 데가 없다는 뜻이었다. 죽여야 한다고 결정했으면 과감히 죽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영웅이 될 수도 없고, 사랑에 온 몸을 바치는 순정한 영혼과도 거리가 먼 사람, 죽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칠 년간이나 추적을 했으면서도 엉뚱하게 한눈이나 팔다가 죽여야 할 이유를 망각하고 아무 짓도 못한 채로 그냥 돌아서 버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내, 이중성, 불완전한 이중성, 자기의 여자가 자기의 후배에게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짓도 못하는, 무엇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지조차 결여된 상태의 그런 사내에게는, 아닌 게 아니라 그런 남자에게 사랑과 신뢰를 바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철저하게 분리되어 버린 나, 이런 나를 통합해서 완전한 영혼으로 거듭나게 할 방법은 없는가? 내가 나를 흙으로 묻어 버리면, 그러면 통합에 거의 근접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겠지. 아아, 자살에의 염원은, 아직도 그렇게 내 안에 하나의 거대하고도 집요한 꿈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꿈이라는 것은, 그것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꿈이 아니던가. 누님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런 억지스런 욕망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삽 이리 주고 어서 들어가. 무슨 할머니의 지팡이처럼 삽이나 계속 붙잡고 서서 그게 뭐야.”
누님은 그때까지 품에 안고 있던 빨래를 마루에 내려놓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니, 안 돼. 누님이 손을 대서는 안 돼.”
“얘는, 그게 무슨 부적이라도 된다고.”
“그보다도 누님은 내가 이런 꼴로 다시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나는 불쑥 그렇게 묻고, 누님의 얼굴을 뚫어져라고 쳐다보았다. 불시에 공격을 당한 꼴이 된 누님은 당황해서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는 체념한 듯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그러셨어. 너 곧 올 거라고, 너 오면 주라고 암소도 두 마리 사 놓으셨어. 작년에, 그 가운데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서 지금은 세 마리야. 저쪽 모퉁이로 외양간 있는데, 어쩔래, 가서 볼래?”
"도대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러니까 지금 내가 소 따위나 기르려고 내려온 거란 말이야?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거란 말이야?“
“알아. 넌 소나 기르려고 내려온 게 아니란 거, 알아. 나도 다 알아.”
“뭐? 뭐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어머니가 원래 좀 그러시잖아.”
“그러시다니, 뭘?”
“그러니까 내 말은, 내 말은, 아이 참, 넌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
“화가 안 나게 생겼냐. 내가 갈 길이, 가야 할 길이, 내 운명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해져 있다는데 그럼 화 안 나게 생겼냐고, 응?”
“얘는 참, 뭘 그렇게까지 엄청나게, 어머니는 그런 엄청난 생각으로 소를 사놓으신 게 아니야. 그러지 마.”
“정말 보살이네, 문수보살이야. 그렇다면 어머니는 왜 소를 사 놓으신 거래?”
“네가 은선암에 다시는 안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어쩌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너에게 선물을 주시는가보다고 편하게 생각하고 말기는 했지만, 아무튼, 아무튼지 어머니는 그러셨어. 혹시라도 네가 오거든 소를 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왜 은선암을 다시는 못 가? 나는 갈 거야. 내일 당장 은선암으로 갈 거야.”
“그래, 가봐. 어머니도 네가 오기를 기다리실 거야.”
“아니야, 천만에, 내가 왜 거길 가? 난 안 가, 안 갈 거야.”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해. 가지 마.”
말문이 막혔다.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누님을, 누님의 따귀를 갈겨주고 싶었다. 누님의 따귀는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오른손을 번쩍 들어 순간적으로 힘을 한 넣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왜 하고 싶으면서도 하지 못하는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삽으로 토방을 서너 차례 콱콱 찍어대다가, 거칠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누님은 부엌으로 갔다가 옆방으로 갔다가, 물소리를 내다가 빗자루질 소리를 내다가 또다시 물소리를 내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는 눈치였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로 누님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가 또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이를테면 혼수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랜 방황의 끝에 더 이상은 어쩌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탕자의 지쳐버린 심신으로, 그렇게 까무룩이 몸과 마음을 모두 놓아버리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나를 위해 누님은 부지런히 뭔가를 만들고 치우고, 그리고는 마침내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지만, 하지만 나는 마치 저 멀리 고개를 넘어 사라지는 어느 여인의 하얀 옷자락을 보듯이 희미하게 전해오는 누님의 안타까운 손길만을 간신히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