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어떤 살인(4)

두꺼비네 맹꽁이 2021. 1. 13. 12:03

21

난 오늘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포기하기로.

아니다. 포기보다는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이 맞겠다.

아니면 거부?

그래, 거부라고 하자.

그렇다고 지금 당장 가입하고 신고식 치르고 실전에 투입되고 싶다는 얘긴 아니야. 별 볼일 없는 것이라 해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받아야 하거든. 그것까지 그만둔다면 우리 엄마 아빠는 아마 죽거나 기절할 거야. 남들 다하는 과외 한 번 못 시켜 미안하다고, 면목이 없다고 귀가 아프게 노래를 부르시는데 나도 염치가 있지, 최소한 그 정도는 견뎌줘야 하는 것 아니겠냐.

 

내 동생 기집애는 무슨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로 재산을 삼겠다는 둥 엄마 아빠를 위협하지만 그건 열등생이나 하는 짓이고, 나는 적어도 그런 차원으로까지 나를 떨어뜨리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거든. 사실 내 동생 기집애 불쌍하기는 해. 불쌍하지만 아직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침묵하는 거야.

그런데 요새 기집애들 왜 그러냐. 왜들 그렇게 허약해진 거야. 얼굴이 재산이라니, 얼굴만 잘 빠지면 공부도 돈도 뭐 신경 쓸 일이 없다니, 이게 어디 사람이냐. 난 말이야. 이 세상의 성형외과를 모조리 폭파하는 그날이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 엄마나 아빠나 할아버지도 아마 같은 생각일 거야.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차마 말로는 표현을 못 하지. 왜냐하면 그분들은 이미 자신들의 시대를 넘어와 버렸거든. 넘어온 지도 모르게 넘어 왔고, 넘어온 뒤에서야 넘어 버렸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린 것이거든. 그래서 생각은 있지만 그 생각을 말로는 차마 표출하지를 못하는 거야. 왜냐하면 자신들의 시대도 아닌데 뭔가 참견을 한다는 게 부끄러우니까.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 엄마나 아빠 같은 사람들은, 단 한 번이라도 날개를 달아보고 싶다는, 날아가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어쨌든 단 한 번이라도 날개를 달아보고 싶다는 그 욕망 하나 때문에 자살도 못하고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나는 가끔 들어. 내가 그 불쌍한 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내가 뭔가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겠지만 해주고 싶은데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열심히 공부 잘 해서 좋은 데 취직하고 부자나 권력자 딸과 결혼하는 거? 그럴지도 모르긴 해. 적어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해. 하지만 그건 아니거든.

엄마나 아빠나 모두 얼굴에 씌어 있어. 말은 그렇게 해도 그 말은 진심이 아니니까 믿지 말라고 씌어 있는 게 내 눈에 보여. 보인다구. 그러니까 엄마나 아빠는 다만 세상이 그러니까, 그런 세상을 따라가지 않으면 소외되니까,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서 따라가는 척해보는 것일 뿐 실제로는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야.

 

할아버지는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지. 할아버지는 신선이 되고자 하시는데 말이야. 그건 아마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랬던 것 같아.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거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외로워진 할아버지가 신선이라는 도피처를 찾게 된 것인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그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는 머지않아 신선이 될 거라는,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어쩐지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런데 신선이라는 게 뭘까.

가벼운 거 아닐까?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두려울 이유도 필요도 없는, 한없이 가벼워서 그 어떤 먼지도 내려앉을 수 없는 그런 것을 신선이라고 하는 거 아닐까?

 

그래서 신선이란 내가 있으면서도 나를 주장하지 않고, 주장할 필요도 없고, 주장하지 않는데도 내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는 그런 존재인 것 같거든. 만약에 이런 내 생각이 옳다면, 할아버지는 이미 신선의 길에 들어섰다고 봐도 좋을 거야.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엄마는 할아버지가 날마다 노인당에서 화투나 치는 줄 알지만 할아버지는 노인당이 아니라 뒷골목 구석구석에 처박힌 쓰레기들을 치우는 일로 하루를 보내시거든. 나도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이것은 아마 할아버지의 유일한 비밀일 거야. 그리고 간직하고 싶은 개인 재산이기도 할 거야.

난 이런 할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 자랑스러운데, 그런데 자랑스럽다고 자랑할 수가 없어. 자랑스런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는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를 이렇게 유인하고 있는, 내가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이런 사회를 나는 무릎 꿇고 곱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야.

 

이게 내가 조직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고, 학교공부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이유이기도 해.

사실이야. 사실로 난 쓸어버리고 싶어. 자다가 일어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로 기가 막히거든. 기가 막히고 답답해서 그만 터져버릴 것 같아.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공부나 하고 있겠냐. 어떻게 공부나 그럭저럭 잘해서 취직이나 대충 하면 된다는 뭐 그런 것을 꿈이라고 꿀 수 있겠냐.

미안하다. 내가 그만 흥분했어.

 

그러나 오늘은 여기서 이만 끝내야겠다. 할아버지가 일어나실 시간이야.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에 국제펜팔을 하셨다는데 말이지. 그때의 교류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야.

지금은 물론 우편이 아닌 인터넷으로 보다 간편하게 연결되고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런 할아버지가 정말로 자랑스러워. 그리고 부러워. 부럽지만 내가 처한 환경은 이미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단 말이거든.

이런 얘기 자꾸 하면 안 되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도 나는 이런 식의 넋두리로 밤을 곱게 소비하고 말았구나. 다시 한 번 미안하다, 내 고등학교 시절들아. 언제인가는 이런 부끄러운 시간들도 꿈을 찾는 모색의 시기였다고 여기며 미소 짓는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