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한줌의 도덕(12 최종회)

두꺼비네 맹꽁이 2020. 12. 3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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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내가 상상해볼 수 있는 장면은 거기까지다. 그 이상은 내 상상에 닿지를 않는다. 그날 밤 너희들이 구절초꽃으로 무엇을 했고 삼표양초 오백 자루를 어떻게 활용했는가의 문제는 내 상상의 그물에 잡히지를 않는다.

아무려나 양초는 녹아서 파라핀유가 되고 파라핀유는 발화(發火)의 강력한 핵이 되었을 것이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불길이 기와지붕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건 새벽 네 시경이었다고 한다.

 

읍내의 소방차가 모두 동원되었지만 집을 건질 수는 없었다. 잿더미 속에서 너희들은 꼭 붙은 채로 발견되었다. 사지(四肢)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신체의 돌출된 부분은 거지반 사라지고 없는, 어느 쪽이 여자이고 어느 쪽이 남자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리와 몸통만 남아서 꼭 달라붙은 채로 너희들의 영혼은 집을 떠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얘기에 따르면 시체를 발견한 아버지는 그것이 당신의 큰아들 내외의 주검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셨던 모양이다. 큰아들이 아버지 몰래 돌아와서 아내를 끼고 정신없이 뒹굴다가 일을 당했다는 주장은 사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실제로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믿었기 때문에 꽃집의 아주머니와 슈퍼의 아저씨가 막내아들이 간밤에 어쨌다는 둥 증언을 하고 나섰을 때 명예훼손이라고 즉각 고소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속속 드러나고 발견되는 새로운 증거들은 아버지의 모든 당당함을 주저앚혀 놓기에 충분했다. 그 가운데서도 막내아들의 하숙방에서 발견된 며느리의 편지 한 통은 아버지의 말문까지 닫아놓았다.

아우야, 너는 그렇게, 용의주도하게 아버지의 권위를 짓밟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너의 목적은 달성된 것일까. 너는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혁명을 완성시켰다고. 하지만 아우야, 저기 어디 골목이나 혹은 대추나무 가지에 앉아 있을 너의 영혼이 만일 눈을 뜨고 있다면 네가 아버지의 가슴속 흰쥐를 한 마리도 몰아내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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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역시 우리 아버지다운 면모가 있었다. 여느 사람 같으면 수치스럽고 창피하다는 이유로 그 고장을 떠나고 말았을 테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숯덩이로 변한 집터의 한쪽에 콘센트 막사를 설치해 놓고 아버지는 흰쥐를 대량 사육하고 계셨다. 막내아들의 극렬 행동으로 말미암아 경찰 수뇌로부터 몇 차례인가 경고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스스로 사직서까지 작성하신 아버지이니만치 온 몸에 절망의 너울 같은 것이 드리워졌을 법도 하건만 분위기에서 풍기는 당신의 위엄은 전보다 오히려 새로운 방식으로 두터워졌다는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새로운 위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과거에는 한 번도 보여주신 적이 없는 아버지의 그 깊어진 눈동자와 일관된 침묵,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이 말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깊어진 침묵으로만 느껴지는 조용한 음성과 그리고 손의 위치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위엄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눈동자는 아닌게 아니라 선방에서 홀로 오랜 세월을 보낸 노승의 그것을 연상하게 했고, 어쩌다 한 마디씩만 하시는 말씀에는 동굴에서의 그것과도 같은 울림이 있었다. 게다가 지병인 심장병이 심근경색 초기증세로까지 발전한 탓으로 아버지는 항시 가슴에 손을 얹고 다니셨다.

내가 일 년여만에 집으로 들어간 그날도 아버지는 언제 당신을 공략해 올지 모르는 가슴의 통증을 염려하며 심장이 있는 쪽에 손을 얹어놓고 계셨다.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서는 나에게 아버지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 그래, 인제 돌아왔냐이 한 말씀만 나직이 하시고는 숯덩이로 변한 집터를 그윽한 눈으로 둘러보셨다. 그뿐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더불어 무언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침묵이라는 완강한 무기로 나의 그러한 생각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버리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당신의 무엇인가를 마침내 버리셨던 것일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새로이 얻어내고 계셨던 것일까. 아무려나 아버지는 이제 그렇게, 굳이 호통을 치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압력이 높아진 아버지의 심장이 마침내 거센 펌푸질을 시작하고,그리하여 아버지를 쓰러뜨렸을 때에도 나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고,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에게 마지막 진언이라도 드려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몸이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아버지의 온 몸에서 내밀히 뻗어나온 일종의 기()와도 같은 것이 나를 그처럼 움직이는 인형으로 만들었던 것이었을까. 시종일관 고개를 수그린 채로 나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아버지의 장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대단했다는 문장 외에 달리 적절한 용어를 찾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영전을 찾았다. 전에는 뒤에서 손가락질로 아버지의 인격을 헐뜯고 욕하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찾아와서 아버지의 유고를 아쉬워하고 슬퍼했다.

장례를 끝내고 난 뒤에서야 나는 그토록 많은 조문객이 몰리게 되 경위를 어렴풋이나마 유추할 수는 있었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유고를 슬퍼하는 그들의 표정에 어떤 가식이나 체면치레용 의례 같은 기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들은 진심으로 슬퍼했다.

 

침통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그런 뒤에 그들은 저마다 마치 아버지의 생전에 아버지와 그렇게 약조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하나같이 아버지의 흰쥐 사육장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행위는 굳이 따지기로 하자면 명백한 절도에 해당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쉴새없이 째려보는 흰쥐 한두 마리씩을 주머니에 넣거나 혹은 품에 안고 씨익씨익 웃는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흩어졌다.

그 많은 문상객들이 한두 마리씩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흰쥐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번식력이 왕성한 흰쥐는 그때에 이미 수천 마리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흰쥐에게는 그 나름의 상황판단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문상객들에게 선택되지 못하고 남아있던 흰쥐들은 흰쥐들 스스로 지정된 자리를 빠져 나와 어디로인지 사라져 버렸다. 더러는 숲으로 들어가고 더러는 민가로 스며들어갔을 터이었다.

 

                                                                                                      끝           1997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