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한줌의 도덕(9)

두꺼비네 맹꽁이 2020. 12. 2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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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후는 그날 아침 출근 직후에 대추꽃을 보았다고 했다. 지하실이 층층으로 갖추어진 그 건물 앞 마당에 대추나무가 있었다. 여느 때는 무심히 보아 넘겼던 대추나무가 그날은 별스럽게 눈에 밟혔다.

처음부터 대추꽃이 눈을 채운 건 물론 아니었다. 어떤 명사 하나가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씌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직후부터 그는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체로 보아 최미리의 유년기는 다복했고......> 짐작컨대 그렇게 기록되어야 할 취조관련 보고서의 문장 한 귀절이 <대추로 보아 최미리의 유년기는 다복했고......>로 잘못 씌어있는 그 <대추로 보아>를 읽는 순간 아침에 보았던 대추꽃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고 진후는 말했다.

 

그렇다고 그때 그 대추꽃에서 유년기의 금이를 발견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금이의 얼굴을 떠올린 것은 최미리의 눈을 발견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요컨대 아침의 대추꽃은 다만 거기에서 흝날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별다른 의미도 없이,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어쩔 겨를도 없이 대추꽃은 그의 눈으로 들어와서 머릿속에 둥지를 틀었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만이 아닌, 실제로 뭔가 이물질이 머릿속에 들어와 요긴한 부분을 장악해 버린 것처럼 그는 현실에 충실을 기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최미리가 지하실로 끌려오는 순간에도 그는 대추꽃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때문에 그는 끌려오는 최미리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일종의 먹이를 느꼈을 뿐이었다.

 

그렇다. 진후가 책임맡고 있는 지하실로 끌려오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그때부터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후의 먹이였다. 그는 자신의 먹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번에 끌려온 먹이는 좀 독특한 먹이인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의 그는 먹이에게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추꽃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먹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던졌다.

거기 앉아

여느 때 같았으면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느 때의 그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지하실에서는 사실 말이 필요 없었다. 적어도 앉으라느니 서라느니 따위의 말은 별 쓸모가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사치로 간주되었다. 끌려온 먹이에게 사치의 목욕을 시켜 무엇을 취할 수 있겠는가.

진후는 먹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먹이에게 이쪽이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이쪽은 먹이에 굶주린 짐승이라는 점을 상대에게 우선적으로 주지시켜야 한다. 그래야만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은 많았다. 단매에 상대방의 정신을 빼놓고 입에서 소중한 것들이 저절로 술술 흘러나오게 하는 기술은 그가 가진 여러 종류의 기술 가운데서도 백미였다.

그런데 그는 이제 무언가 마지막을 예감해야 했다. 예감은 명사 하나가 잘못 기재된 예의 보고서를 훑어보다 말고 덮어 버렸을 때에 이미 아슴푸레하니 온 몸으로 감지되고 있었다. 그는 끌려온 여자에게 거기 앉아,라고 말했다. 그 말은 도무지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놀랬다.

처음에는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줄도 몰랐다. 옆에 누구 다른 사람이 있다가 그 소리를 지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방은 진후의 방이었다. 다른 사람은 진후의 필요에 의해 진후가 부를 때에만 들어오게끔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그는 순간적으로 어안이벙벙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든 채로 화석처럼 멍하니 있어야 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일단 마주쳐버린 눈길을 어떻게 돌려야 하는지를 그는 몰랐다. 그는 그녀의 눈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눈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 이어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를 아프게 하지 마세요......

 

고문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건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안다. 실제 고문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조차도 고문이 사람의 몸과 마음을 두루 아프게 한다는 걸 상식으로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에 버금한다. 아니, 진리다. 이 진리를 진리로 인증해 준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진후의 면전으로 끌려온 사람은 백이면 백 모두가 악담으로 일관했다.

이쪽에서 굳이 짐승스러움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자기들이 먼저 이쪽을 짐승으로 간주하고 침을 뱉거나 눈에 독기를 품고 쏘아보던 것이었다. 그런 자들의 눈에서 어떤 진실을 읽을 수 있었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제법 진실스럽게 한다고 부드러운 눈매로 나오는 자들마저도 그 머릿속에는 갖은 계산과 음모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걸 진후는 모르지 않았다.

고문을 체험한 자들일수록 부드러운 눈매로 음흉한 계산기를 두드리기 마련이었다. 입가에 침이 마르도록 정의니 진실 따위를 떠들어대는 자들의 눈에서 진후는 실제 그런 것들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제가 말을 듣지 않으면 저를 고문하실 건가요? 아프게 하지는 말아 주세요......”

 

최미리는 물론 이 말을 직접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후는 그녀의 눈을 매개로 그녀의 그 소리를 들었다.

고문은 본디 아프다. 그런데 아프게 하지 말아 달라면, 결국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닌가. 너무도 평범한, 평범한 탓으로 좀체 듣기 어려운, 어쩌면 백 년을 고문 일에 종사한다 해도 들어볼 것 같지 않은 <진리>의 소리를 그는 그녀의 눈을 통해서 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직후에 그는 유년기의 금이를 보았다.

미친개에 물렸을 때의 그 눈. 그 순정한 눈이 최미리의 육체를 빌려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을 그는 받았다. 느낌의 시간은 짧았지만, 그러나 깊고 강렬했다.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진후가 그때 만일 최미리의 눈이 금이의 눈과 닮았다는 따위의 생각을 했었더라면, 그는 아마 즉각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아니다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자신의 잘못된 눈을 꾸짖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러는가. 이 여자가 누구인가. 아아 그래, 이 여자는 최미리일 뿐이다. 금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관련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건방지게 무슨 야학이니 노동이니 주접을 떨다가 잡혀온 하나의 범법자일 뿐인 것이다......그렇게 속으로 자신을 타일렀을 것이다. 잠시 헛것을 보았다고, 그렇게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생각에 앞서 느낌으로 금이를 만나 버렸다. 생각은 그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것 같으면 이내 잘못 되었다고 고개를 저을 수가 있지만 느낌이란 본디 그런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느낌에는 저어야 할 고개가 없었다. 아니라고 부정할 틈이 없었다. 그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지 못했다. 자신의 느낌이 잘못 되었다는 부정의 작은 꼬투리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로 그는 급속히 최미리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23

 

 '평범한 기술자'로서의 진후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엉뚱스럽게도 자기가 그때까지 일종의 진리에 목이 말라 있었다고 생각했다. 최미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처럼 여겨졌다. 그는 이제까지 읽어 왔던 것들을 거꾸로 읽기 시작했다.

<대체>가 어떻게 해서 <대추>로 변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진후에게 그것은 섬뜩한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최미리와 관련된 자료 일체를 가방에 꾸려 담고 다니면서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것을 다시 검토해 나갔다. 처음부터 그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 미처 깨달을 사이도 없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상부의 지시에 의해 최미리를 <무조건> 석방하던 날 진후는 그녀에게 여비로 쓰라고 돈을 주었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상당한 파격이었다.

 

그녀가 만일 그 돈을 받았더라면 진후의 행로는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사실 최미리와 관련된 서류 일체를 개인 가방에 꾸려담을 때까지도 그녀의 뒤를 좇겠다는 생각 따위는 해보지 않았었다.

그저 막연한 어떤 욕망으로, 그 서류를 파기하라는 명령에 실제로 복종하는 대신 가방에 집어넣는 방식의 말하자면 은유적인 파기로써 명령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하실 생활 십여 년에 최초로 마음 한 번 크게 먹고 진후 자신의 돈을 꺼내서 내밀었건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돈을 받지 않겠다는 그녀의 논리는 간단했다.

아저씨가 저한테 돈을 주셔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진후는 별 까닭도 없이 애가 탔다.

받아라. 내가 너를 심하게 다룬 것도 아니고 뭐 크게 잘못한 것 또한 없잖니. 제발 받아라. 주머니에 돈 한푼 없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아저씨가 저한테 잘못한 게 없으니까 안 받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걷는 걸 좋아해요. 걸을 거예요

 

진후는 그녀가 곧장 학교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에는 그녀와 야학을 같이 했던 이른바 동지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서 돈을 빌려 쓸 수도 있을 터이었다. 그녀의 학교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계산해도 세 시간 남짓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는 처음부터 학교와는 정반대 쪽으로 걸음을 놓고 있었다.

그녀의 신발코가 향한 쪽으로 그녀의 연고를 찾아 선을 그으면 강원도가 나왔다. 강원도에는 설악산이 서쪽으로 끝나는 지점의 민통선 부근 무지개약수라는 약수터 마을에 그녀의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할머니를 찾아 나서야 할 이유는 아직 없었다. 보고서에는 그녀와 그녀의 가족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한 걸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체포되었다가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석방된 그녀가 우선적으로 찾아가야 할 곳은 학교였다. 진후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그녀는 야학에서 공단 근로자들에게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자정 무렵에 연행되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행방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녀의 동지들 가운데는 아무도 없을 터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당연히 학교로 돌아가서 동지들도 만나고 자신의 열과 성이 담긴 야학의 근황도 살피고 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진후의 그런 상식을 여지없이 깔아뭉개고 있는 것이었다. 이 여자애는 혹시 자기 부친의 사망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진후는 그런 쪽으로 결론을 내 보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것은 애당초 얘기가 안 되는 소리였다.

보고서를 작성한 요원의 추측성 가설에 의하면 그녀가 야학에 투신한 직후부터 그녀는 가족들로부터 거의 버림을 받은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은 아직 몇 안 되었고, 더우기나 그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끔 되어 있었다.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요원들의 긴급전문 한 장은 아직 대외비로 분류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만간 기자들의 코에 그 주검의 냄새가 맡아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알려질 때 알려지더라도 알려질 때까지는 일단 비밀에 부친다는 게 내부방침이었다.

 

진후 역시 그 사실을 최미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 문제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과 연관된 그 어떤 얘기도 그녀에게 말해준 바 없었다. 그녀의 모친은 미국에서 남편과 격렬한 언쟁을 벌이고 혼자 돌아와 있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터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친과 모친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 가족과는 일체 연락이 끊어진 상태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세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학교를 뒤로 하고 엉뚱스럽게도 할머니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돈을 주려다가 거절당한 진후로서는 미상불 그녀의 뒤를 따라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따라간다거니 어쩐다거니 그런 의식조차 없었다. 저도 모르게 발이 그쪽으로 움직여졌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물론 독한년, 이런 독한년이 있나, 어디 두고보자, 따위 미묘한 분노도 없지 않아 있었을 터이었다.

 

24

 

최미리의 부친은 그녀가 팔삯둥이로 첫울음을 터뜨린 뒤부터 승진을 거듭한 걸로 기록되어 있었다. 육군 대위에서 소령으로 계급장을 바꿔 단 지 육 개월만에 중령이 되었다. 그가 대위에서 대령 계급장을 어깨에 붙이게 되기까지는 일 년이 채 안 걸렸다.

혁명위원회에서 그의 공훈을 특별히 높이 사준 걸로 되어 있었지만 공훈의 구체적인 내용은 파일에 적시되어 있지 않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그는 일종의 하극상을 범한 것 같았다. 육군 대위 시절에 그는 소규모 특수부대의 부관으로 복무중이었다.

 

그러니까 그 해에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극비리에 결성된 혁명위원회에서 그가 복무중인 특수부대장에게 모종의 임무를 부여했는데 부대장이 명령을 거부했다. 그래서 부관인 그가 직속상관을 대신해서 그 명령을 수행해 버렸다. 직속상관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나선 그는 군형법상 총살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지만, 헌법까지를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법률에 침을 뱉기로 결심하고 일어선 혁명위원회는 그에게 총살형 대신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의 직속상관은 반혁명분자가 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사람의 습관이랄까 유전인자는 본디 앞서간 사람의 흉내를 내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어서, 그로부터 십팔 년여가 지난 뒤의 어느 날 그에게 국방장관을 체포 감금하라는 곤혹스런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는 그 난처한 명령의 수행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가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그의 부관이 군대를 몰고 가서 국방장관을 체포 감금해 버렸다. 상황이 완료된 뒤에서야 그 소식을 접한 그는 노발대발 화난 음성으로 부관을 찾았다. 그러나 그때에 그는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하 부대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있었다.

 

노발대발 화를 냈다는 이유로 그는 자신의 부관에게 체포되어 법정에 섰다. 군법회의는 노발대발 화를 낸 그의 죄가 상당히 중하다는 쪽으로 판결문을 작성했다. 그 판결문에 의해서 현역 육군 중장인 그는 이등병으로 강등되었고, 이후 십오 년 동안 철창 안에서 보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불행중에도 그는 제법 운이 좋았다. 조만간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어있는, 그러니까 그에게 국방장관을 체포 감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동기생이었던 것이다.

그 동기생의 비서로부터 의미있는 제안이 들어왔다. 미국으로 가서 조용히 살겠다는 내용의 각서 한 장을 써 주면 석방은 물론이려니와 복권도 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각서를 써주고 철창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되찾은 예비역 장성의 신분으로 부인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그는 각서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고, 미국의 조야 인사들을 상대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다녔다. 일종의 구명운동을 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낮에는 각서의 내용대로 조용히 살아가는 것처럼 온 종일 자유의 여신상을 쳐다보며 시간을 죽이는 식의 가면을 쓰고, 밤이면 은밀히 정계의 실력자들을 찾다 다니며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의 동향보고가 현지의 요원들로부터 수시로 타전되어 왔다.

요원들의 그러한 보고에 접한 국내의 상층부 인사들은 몇 차례인가 비밀리에 대책회의 가졌고, 마침내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보잘것없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맑은 물을 온통 휘저어놓을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상층부 인사들은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리원 작전>이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야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그의 딸 최미리에게 일단 공산주의의 옷을 입힌 다음 그것을 근거로 미국 정부에 그의 강제귀국을 공식적으로 협조요청한다는 내용의 작전이었다. 야학에 관여한 선생과 학생들을 모두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내고, 그렇게 묶어낸 조직에다 이를테면 <남조선 혁명본부>라든가 <신빨치산 유격대> 따위의 명칭을 부여한 다음 최미리를 그 불온한 조직의 우두머리로 앉히고, 우두머리를 멀리에서 조정한 자는 다름아닌 그녀의 부친이었다는 발표와 함께 공한을 보내면 제아무리 강대국 미국이라 할지라도 협조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게 상층부 인사들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작전의 핵이었던 그가 돌연 자살을 해 버렸다. 권총자살이라는 것 외에 자살의 상세한 이유는 보고되지 않고 있었지만, 짐작컨대 부인과의 극심한 불화로 인한 일시적인 정신착란의 결과였던 것 같았다. 그의 부인은 미국생활 일 년 삼 개월만에 혼자 귀국해 버렸던 것이다. 남편을 타지에 두고 혼자 돌아온 그의 부인 또한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다.

아무려나 <미리원 작전>은 원인이 소멸되었고, 진후는 진후 자신의 기술에 의해서 자칫 거대한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뻔도 했던 최미리의 뒤를 따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