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지 마세요
하늘에 달이 둥글게 가뿐해지는 날이면 어디론가 가고 싶어진다. 저기 어디선가 애타게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 있는 것만 같아진다. 이지러진 형태의 달은 뭔가가 샐쭉해서 마음도 잠을 자고 싶어하게 되지만 둥글게 부풀어오른 달은 기지개를 켜듯 마음을 동하게 한다.
얼른 가야지, 얼른 가야 해. 늦으면 토라져서 안 받아줄 지도 몰라.
서둘러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선다. 시계도 없는 손목을 쳐다보기도 하고, 보일 리 없는
하늘 한가운데 은하수를 찾아보기도 한다.
둥글게 배가 불러오른 임산부가 저만치서 다가온다. 바닷물이 오월 백중 만조처럼 쏴아 밀려온다.
여의도 육삼빌딩이 통째로 바닷물에 삼켜지고, 그 위에서 거대한 고래가 활처럼 휘어진 몸으로 물장난을 치듯이 산고를 치른다.
오오, 너 왔구나. 고향에 오니 좋지?
오래 전 한때 임산부를 쫓아다닌
적이 있다. 길을 가다 임산부를 발견하면 별 생각도 없이 뒤를 따라가곤 했다. 가다가 깜빡 딴 생각에 빠져 잊어버리면 하릴없이 돌아서고,
돌아서서 걷다가 다시 임산부를 발견하면 또 따라가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뒤뚱뒤뚱 위태롭게 걷는 그녀가 혹시 발을
헛디뎌 쓰러지기라도 하면 얼른 달려가서 일으켜주겠다는 그런 기특한 발상은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서해안의
만조는 고요하면서도 거대하고 광포하다.
포유동물은 새끼를 낳을 즈음 한없이 온순해진다. 그리고 한없이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또 한없이
광포해진다. 한없이 온순하고 날카롭고 광포한 존재, 이 형용모순의 존재가 바로 어머니 혹은 고향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이즈음이다.
며칠 전 보름날 저녁 문득 이런 신파조의 생각이 들었다. 모든 여인은 슬프다. 슬퍼서 아름답다. 슬퍼서 아름다운 존재
여인이여, 나 너의 눈동자에 마늘 한쪽 심어주고 싶구나.
그게 왜 하필 마늘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흔하디 흔한 꽃도 아니고 마늘이라니. 이러는 나는 아마
전복적인 사유에 목이 말라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사실 위험하다. 전복적인 사유란 역사적 체험과 존재의 모순을 자각하는 골수로부터 봇물이
터진 듯 저절로 흘러나와야 한다. 억지로 무엇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곧 노자가 말하는 作爲의 시작이다. 작위란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속임수일 뿐이다.
내가 나를 속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자기연민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바닷가에 나가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그것이 보인다. 나이란 참 비겁하구나 하는 열패감에 입술을 깨물어보기도 하지만 그게 어디 나이 탓이랴.
삼십대 초반 무렵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서른세 살까지만 살고 자살을 하자. 사람이 나이 사십에
가까워지면 주체성이 없어지고 비겁해진다. 이것이 아마 그 무렵 나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였을 것이다.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를 눈물 쏟아내며
취재를 한답시고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그랬던 무렵, 이른바 기성인들이란 사람도 아니고 뱃속에 거대한 창고만 수십 개씩 감추고 있는 괴물처럼
여겨졌다.
나이가 칠십 팔십이 넘어도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타협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자칫 보수나 수구와 같은 레벨로 읽힐 수도 있지만 사회과학적 의미에서의 타협불응이란 절대진리에 대한 수호 내지는 생산을 말한다. 절대진리라는 표현은 대단히 딱딱하고 이념의 냄새마저 풍긴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실망스러울 정도로 말랑말랑하고 미끈미끈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곧, 이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나를 잊지 마세요.
이것은 어떤 여인이 내게 하는 호소가 아니다. 내가 어떤 여인에게 주는 호소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추상명사다. 즉 그 자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다. 이 거대한 <무엇>은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면 언제라도 달려가서 그의 것이 된다.
내게는 그것이 보름달이다. 밀물이 들어오는 만조의 바다이기도 하다. 둥글게 솟아오른 임산부의
배이기도 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곧 어머니이며 고향이다. 어머니요 고향이란 내 생명의 시원이 아니던가. 근원이
아니던가.
그러나 고향은 광포하고 날카롭고 부드럽다.
이 점을 몰각하면 고향은 센티멘털리즘으로 격하된다. 어머니는, 고향은 무조건 나를 사랑해줘야 한다는 이기주의, 이 지독한 센티멘털리즘은 필연적으로 끼리끼리 문화를 창출한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저 유명한 경구. 비겁한 권력은 국민을 가능한 한 그런 쪽으로 몰아가려 한다. 그 틀 안에서 그럭저럭 잘먹고 잘살되 다른 것은 절대로 간여하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라는 것이다.
지난 세월 우리는 줄곧 그렇게 살아왔다. 무서운 세월이었다. 그 무서운 세월의 파편들이 아직도
날씨가 흐리면 다리를 쑤시게 한다. 이제 청춘의 시기는 가고, 보름달에서 임산부의 둥글게 솟아오른 배를 발견하는 계절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계절은 저 심해에서 헤엄치는 고래들의 새끼가 내 혈육일 수도 있다는 자각마저 가능하게 해준다.
바다로 가자. 달이 둥글게 솟아오르거든 임산부가 산고를 치르는 고래들의 바다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