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몽상 혹은 불
마당에서 장작불을 지핀다. 화톳불은 아니다. 철판을 잘라서 네모나게 대충 용접한 난로 명색의 통 안에 책을 찢어서 넣고 잔가지를 넣고 그 위에 장작들을 켜켜로 쌓아놓고 불을 지핀다. 해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제 곧 나올 것이다.
불이란 밤과 짝을 지워주어야 제멋을 내기 마련이다. 청사초롱도 그렇고 호롱불도 그렇고 화톳불 역시 밤을 안겨주어야 좋다고 한다. 별이 없는 밤에는 불꽃이 별 대신 반짝거려주고, 별이 있는 밤에는 불꽃이 별을 살짝 희끗 가려주는 기막힌 은밀을 배경으로 깔아준다. 은밀한, 아, 그래, 이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 있는 단어인가.
유럽의 중세기 귀부인들이 내 앞을 오락가락한다. 패티코트 같은 것으로 몸의 특정 부위를 한껏 과장해서 드러낸, 아기처럼 아장아장 걷다가 어머, 소리와 함께 왕자님 옆에서 비틀거리기도 잘 하는, 마음에 쏙 드는 얘기를 해주면 감동해서 기절도 잘 하는 귀부인들이 한둘도 아니고 다섯, 여섯, 아이고, 열두 명이나 저 앞에서 오락거린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바람이 데려온 것인가?
아 그래, 바람, 간밤에 바람은 참 대단한 위용을 과시했었다. 사막의 모래언덕이 수시로 위치를 바꾸듯이 앞산이 혹시 뒷산으로 변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매우 흥미진진한 관심으로 나는 그 바람을 주시했었다. 바람을 주시했다는 말은 어쩌면 형용모순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는 그렇게 밖에는 말 못 한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더라. 어떤 날은 가슴이 퐁퐁 거품처럼 풀풀 날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은 찐빵 만들려고 가라앉히는 앙금처럼 시시각각 치밀한 조직으로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이 빽빽하게 무겁게 물 속에 가라앉기도 하더라. 심리학 하는 사람들은 이 두 경우를 뭉뚱그려서 조울증이라 한다던가 어쩐다던가. 그 사람들의 이론대로라면 나는 지금 울증에 빠져 있다 하겠다.
그렇다. 나는 지금 우울하다. 기분 좋은 우울이 아침부터 내 몸을 관통한다. 소리도 형체도 냄새도 없는 이 내적 에너지가 나로 하여금 아침의 장작불을 창안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차이콥스키의 비창을 배경으로 깔아놓고 나는 장작불 앞에서 커피를 홀짝거린다. 끝도 없이 늘어선 백양나무들 사이로 쌍두마차가 달린다. 뜬금없는 연기와 불꽃에 놀라서 짖는 옆집의 개소리가 내게는 말의 히힝. 소리로 들린다. 내 심장은 지금 몇 분의 몇 박자로 고동을 치고 있을거나. 아니다. 으멍하게 모르는 척 묻지 말고 착하게 바로 아는 대로 답해 버리자. 사분의 삼박자라고.
차이콥스키와 사분의 삼박자, 이게 조화로운가? 특히나 비창과 사분의 삼박자가 미학적으로 통하는 길이 있는가. 이런 질문은 실상 무의미하다. 음식이나 합금처럼 도저히 통할 수 없는 것도 없지는 않겠지만 통하는 것이 훨씬 많은 게 인간사요 세상사다. 이것을 증명해낸 연금술사들에게 나는 아마 감사해야 할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를 차이코프스키답게 해준 내적 에너지의 원천은 아마도 우울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우울은 대개 한 사람을 갉아먹는 숙주로 머물지만 드물게는 한 사람의 삶 자체로 승화되기도 한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듣고 있노라면 그 우울이 하도 역동적이어서 나는 어느새 펄펄 뛰는 미꾸라지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비창은 뭐라고나 할까, 그래, 시뻘건 불 속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한 마리의 작은 하얀 새 같다. 그 새가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은 불이 뜨거워서가 아니다. 타고 싶어서다. 타고 싶은데 타지 않는, 자기를 태워주지 않는 불에 대한 원망과 항의의 표시, 그것이 지금 불 속에서 격렬하게 파닥거리는 하얀 새의 내적언어다.
불이라는 단 하나의 테마로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죽은 바슐라르를 나는 어쩔 수 없이 생각해야만 한다. 그의 저작 <촛불의 미학>은 시인들의 이른바 필독서라고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산문 취향이라서인지 <불의 연구>에 영혼이 안착하는 것 같더라.
바슐라르의 연구에 따르면 이십몇 년 동안 독한 술을 즐겨 마신 어느 학자가 어느 날 아침 홀연 사라졌는데 침대에 한줌의 재가 있었다고 한다. 체내에 열성 에너지가 축적되어 그것이 마침내 발화되면서 그 사람을 태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이 그 사람을 태웠다는 바슐라르의 증언은 내가 생각하기에 참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 사람 자체가 이미 열성 에너지로 변환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 사람은 불에 의해 탄 것이 아니라 불 자체였다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
음, 술을 썩 좋아하는 나, 나는 오늘도 이렇게 해서 하나의 다행을 발견한다. 나도 어쩌면 내적에너지의 발현으로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아니 한 줌의 흔적을 남긴 채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분좋은 기대감 내지는 소망 같은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