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한국 지식인의 연애문법-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보여주는 것
역사는 흔히 개가죽을 쓰고 호랑이춤을 춘다고들 말한다. 인간이 이런 상황을 견뎌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 물론, 그것을 아주 다행으로, 영광으로 여기는 축들이 있기는 하다. 이른바 거짓말쟁이들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허나 세상은 모두 거짓말쟁이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그래서 굳이 자살 따위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흥미가 진진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 한 사내가 있다.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뿌듯한 보람을 품고 살고 싶”었던 남자 이명준. 그는 아마 철학을 통해서 그 갈빗대가 버그러지는 뿌듯함을 선물처럼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일 게다. 그런데 세상이란 놈이 그리 만만한 것이던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차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간다. 해방이 되자 북으로 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저 한 단어 아버지라는 명사뿐이고, 따라서 정이고 뭐고 아무런 감회도 없는데, 그런데 북으로 간 아비를 두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형사놈에게 얻어맞고 코피를 흘리면서 아버지를 느낀다. 정 비슷한 것 같은 그런 것을 느끼고, 형사놈들이 끼리끼리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하며 칼칼거리며 아버지를 걸레로 만들어가는 면전에서 사랑을 느낀다. 아니 없었던 사랑이 탄생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하여, 이제는 꿈도 무엇도 다 없어졌다.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뿌듯한 보람 어쩌고 하는 소망도 다 사라졌다. 나이 많은 늙은이를 보면, 제 손으로 목숨 하나 끊지 않고 저 나이까지 살아왔으니 어쨌든 장한 일이로다, 뭐 그딴 생각이나 든다. 그래도 어쨌든 여자를 만나고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는 되는데, 그것이 꼭 요런 모양이다.
“바다와 산, 어느 편을 좋아하세요?”
남자가 불쑥 묻고, 여자가 답하는데,
“둘 다 좋아요. 산은 산대로 맛이 있구.......그렇잖아요?”
주여, 이 깡통을 용서하옵소서. 일곱을 일흔아홉 번 더 하여 용서하옵소서. 남자는, 방금 연기를 뿜으며 그들 앞을 떠나가는, 작은 통통배에 눈을 돌린다. 이런 말을 가지고는, 그녀의 마음이 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리 전파를 보내도, 한 편의 수신기가 헐었거나. 주파수가 안 맞으면, 그 전파는 흩어진다. 가르치는 사랑으로?
“바다에 서면 그대로 어디든지 가고 싶어요.”
유행가를 부르는구나. 홈이 다 닳아빠진 레코드에서 흘러오는, 이 강산 낙화유수를, 하지만 이토록 예쁜 아가씨가, 국문학을 배우는 문학도가, 귀여운 생각이 든다. 내 이야기도 유행가지, 본인에게는 아무리 벅찬 넋두리라도, 남의 귀에는 유행가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바에야 무슨 말이면 다르겠는가. 이만한 분별은 있다.
“가면 괴로움이 없는 땅이 나타날까요?”
“몰라요. 나타나든 안 나타나든 갔으면 좋겠어요.”
“그런 느낌은 알 만합니다. 꿈이지요.”
“꿈, 사람은 꿈에 속아서 사는 것 같아요.”
“왜 속아서라고 합니까?”
“그저 속는 거지요. 결혼두 무서워요. 집에서는 가끔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여느 날처럼 그날도 두 시쯤, 한창 햇살이 이글거릴 무렵에 집을 나선다.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에 돌아다본다. 윤애다. 명준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려준다.
“왜 그리 혼자만 다니세요? 이건 저한테 놀러오신 게 아니구, 저희 집으로 오신 거군요.”
노란빛 파라솔 밑에서, 그녀는 웃는다. 명준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녀와 가지런히 걸음을 맞춘다.
“오늘은 선창 말고 다른 데로 가요.”
그는 머리만 끄덕인다. 선창을 끼고 올라가서 오래 걸었다. 명준은, 이럴 때 남자가 두 사람 사이를 이끌어야 되려니, 생각한다. 자기가 손만 내밀면 그녀는 들을 것 같다. 퇴짜맞을 때를 떠올리고 머뭇거린다. 기껏 신사 대접을 받다가, 도적놈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배짱이 있어야 했다. 도적놈.
거침없이 살던 사람들의, 조마조마한 울렁거림을 옮겨볼 자리를, 그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은 좁아서, 눈을 가린 마차 말처럼, 숨 막히고 지루한 산길을, 한 가지 무심한 햇살에 짜증을 부리면서 몰아가는 나날이었다. 요즈음 그 숱한 정치 모임의 어느 하나도 모르고 지내온 생활이었다. 까닭은 두 가지다. 벌어지고 있는 일의 뜻을 잘 알 수 없었다. 너무 큰 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내친 말을 하고 있다. 하느님의 문서를 보고 온 사람들처럼, 철학이란 물건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면, 정말 알고 있는 것보다 목소리를 더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높은 가락만 들리는 판에서는 싸울 뜻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까닭의 두 번째는, 좀 더 가까운 슬기였다. 아버지 아들인 그는 조심해야 했다. 지금 한 여자를 굽혀보자는 생각은, 죄악에 넘친 음모처럼 그를 꾄다. 새로운 지평선에 올라선 사람의, 새로워진 힘이 밀려온다. 그들이 다다른 곳은, 왼편에 마음이 보이는 언덕진 땅 생김이 분지를 이룬, 움푹한 자리다. 오른편으로 멀리 바라보여야 할 선창과 거리는, 막아선 늙은 느티나무의 한 무리 때문에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만 트인 눈길 앞에, 선창의 붐빔을 금방 보고 온 눈에는 기이할 만큼 빈 바닷가에, 모래만 허허하게, 기운 한낮의 햇살을 되비치고 있다. 느긋하면서 두근거리는 힘이 흥건히 속에서 괴어오르고, 명준은 누구에겐가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들은 그 분지에서, 조용함을 즐기듯 한첨 서서 바다를 내다보고 있다가,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는다. 바다에는, 배 그림자도 없다. 탐스럽게 푸짐한 뭉개구름만, 우쭐우쭐 솟아 있다. 희고 부드러운 덩어리에는, 햇빛 때문에, 유리처럼 반짝이는 모서리가 있다. 머리나 어깨 언저리가 그렇고, 아랫도리는 그들이 져, 환한 윗몸을 돋우어준다. 그 모양은, 여자의 벗은 몸을 떠올린다. 금방 물에서 나온 깨끗한 살갗의 빛깔과 부피를 닳았다. 어디서 봤던가 기억을 더듬는다. 영미였다. 그녀가 목욕을 하고는, 곧잘 그의 방 의자에서 농담을 하다가 돌아가곤 할 때, 보기가 민망하도록 곱던 살빛이다. 쓴웃음을 짓는다. 기껏해야 떠올리는 본이라고는 영미뿐, 초라해진다. 영미는 나한테 무엇이 되는가.
친구의 누이, 아버지 친구의 딸, 나의 친구, 주인집 딸? 그는 흠칫한다. 주인집? 왜 갑자기 이런 부름이 나왔을까? 여태까지 그 집을 주인집이라 여긴 적이 없다. 하지만 주인집이 아니고 무언가. 그는 다시 구름을 바라본다. 반짝이는 작은 물체가, 흰 바탕 앞에서 날고 있다. 구름조각이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갈매기다.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흡떠, 물밑에 있는 먹이를 노리고 있는 모습이련만, 떼어놓고 보기에는, 날개를 기울이며 때로 내려꽂히고, 때로 번 듯 뒤채이며, 스르르 미끄러지는, 노곤한 그림 한 폭이다.
명준은 그녀를 돌아다본다.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모래를 비비적거리고 있다. 푸른 줄이 간 원피스가 눈에 시다. 나무 그늘인데도, 바닷가 햇살은, 환하다.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흠칫하는 듯했으나, 가만 있는다. 오래 그러고 있는다. 다음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오래 쓸수록 점점 거북하고 불안해진다. 그녀는 손을 옴지락거리면서, 빼내려는 듯이 했다. 그녀의 움직임이 명준을 갑자기 떠밀었다. 잡았던 손에 힘을 주어 자기 쪽으로 당기면서, 다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붙든다. 입술을 가져가니, 억세게 밀어낸다. 그녀는 두 팔로 그의 가슴을 받치고, 머리를 저어 그의 입술을 비킨다. 명준은, 그녀의 허리를 안았던 손에 힘을 주고, 한 팔로 그녀의 팔을 젖히면서 앞으로 당기자, 그의 가슴을 받치던 윤애의 팔이 꺾이고, 이쪽 가슴으로 푹 안기고 말았다. 그는 두 팔로 그녀의 몸을 죄면서 입술을 더듬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낮추어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끈질기게 마다한다. 명준은 노여움으로 온 몸이 확 단다. 그는 감았던 팔을 확 풀면서, 그녀의 턱과 뒷머리를 거칠게 붙잡아, 틈을 주지 않고 입술을 누른다. 기다리기나 한 듯이, 곧,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부드러운 그녀의 혓바닥을 자기의 그것으로 느낀다.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머리를 붙든 명준의 두 팔에 무게가 걸려왔다. 그는 가슴으로 그녀의 무게를 받아주면서, 그대로 입을 빨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으나, 그의 것을 맞이하는 그녀의 미끄러운 살점은 빠르게 움직인다.
그는 입술을 떼고 그녀의 뺨에, 이마에, 입술을 댄다. 다음에는 목을 애무한다. 원피스가 패어진 틈으로 가슴을 더듬는다. 그녀는 또 한 번 꿈틀한다. 그는 그녀를 힘있게 한 번 가슴에 품었다가, 놓아줬다.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흩어진 머리를 만지는 그녀는, 아주 가까워진 사람 같다. 사람이 몸을 가졌다는 게 새삼스레 신기하다. 사랑의 고백도 없이 일어진 일인데, 어떤 대목을 빼먹었다는 뉘우침은 없다. 대목이라고 하면, 그녀를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반년이라는 시간은 되고도 남을 세월이다. 손을 반쯤 내밀었다가 도로 움츠리고 한, 병신스런 반년, 맑고 가득찬 기쁨이 있다. 명준은 윤애의 손을 잡아다가 두 손바닥으로 다독거린다. 손톱 모양이 고운 기름한 손가락이, 그의 손을 얽어온다. 아까 입을 맞추었을 때처럼, 그 움직임은 그녀의 마음을 옮기고 있다.
은근한 힘으로 명준의 손가락에 응해오는 미끄러운 닿음새를 즐기면서, 처음에 그녀가 보여준, 마다하는 흉내를 눈감아줄 마음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부신 듯 얼른 고개를 숙여버린다. 사랑스럽다.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꺾어서 소리를 내본다. 다섯 손가락을 다 마치고, 다른 손을 끌어다 또 그렇게 한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그의 장난을 보고 있다. 명준은, 처음 짐작과는 달리,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마주앉았을 때 시간을 메우는 흉내를 쉽사리 해내고 있는 일에 놀란다. 아무 어려운 것이 없다. 그녀의 열 손가락 마디가 모조리 끝나자, 이번에는 그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서 하나하나 애무한다. 손톱이 깨끗이 손질이 된 손가락을 이빨 끝으로 딱 물어끊고 싶다. 바다에서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갈매기가 날고 있다.
그날 밤 윤애가 일찌감치 자리를 뜨고 나간 뒤에, 명준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 그녀가 앉았던 방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흐뭇한 기쁨을 즐긴다. 잠자리 날개모양 풀이 꼿꼿한 모시적삼을 입은 그녀의, 깔끔한 자태가, 자기 품에서 숨을 할딱이던 바로 그 몸이라는 일은 그에게 자랑스러움을 준다. 그렇게 튼튼하게만 보이던 돌담의 한 모서리가, 멋쩍을 만큼 쉽사리 허물어진 일은 거짓말 같다. 연애가 희한한 ‘기술’로만 비치던 명준에게는, 뻔히 자기 손으로 만져본 승리조차도, 그러므로 허깨비나 아니었던가 싶게 믿어지지 않는다. 입술을 갖다대자 대뜸 그녀의 입술이 열리던 생각을 하고, 그는 빙그레해진다. 그녀는 베테랑인가? 아니 숨차서 허덕이는 참에 그렇게 된 것이겠지. 내내 두 팔을 드리운 채로였지. 내 허리에 매달리거나, 목에 걸어오지도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저 갑작스레 당하고 만 것일까. 아니, 그녀의 혀는 토막난 뱀처럼, 욕정에 젖어서, 꿈틀거리지 않았나. 부드럽게 젖은 그 살점은, 분명히,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전리품은, 사람인 성싶었다. 그의 만족은 그처럼 크다. 그녀의 마음을 그 동안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몸의 한 군데를 내받은 지금에야 마음놓고 믿을 수 있었다. 마음은 몸을 따른다. 몸이 없었던들, 무얼 가지고, 사람은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자하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몸이란, 험의 마당에 비치 외로움의 그림자일 거다. 그렇게 보면 햇빛에 반짝이는 구름과, 바다와 뫼, 하늘, 항구에 들락날락하는 배들이며, 기차와 궤도, 나라와 빌딩, 모조리, 그 어떤 우람한 외로움이 던지는 그림자가 아닐까. 커다란 외로움이 던지는, 이 누리는 그 큰 외로움의 몸일 거야. 그 몸이 늙어서, 더는 그 큰 외로움의 바람을 짊어지지 못할 때, 그는 뱄던 외로움의 애를 낳지. 그래서 삶이 태어난 것이야. 삶이란, 잊어버린다는 일을 배우지 못한 외로움의 아들, 속였기 때문에 또 다른 속임의 대상을 찾지 않을 수 없는...........................................
남조선과, 윤애와, 그밖에 다른 많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혹은 버리고 북으로 떠난 이명준, 그는 그곳에서 은혜라는 이름의 발레리나를 알게 된다. 그리고 혁명이라는 것이, 공산주의라는 것이 자생적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거지근성에 쩔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기함을 한다. 그 기함이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자신을 기대게 한다. 노동신문에 일자리를 잡았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아니 적응해 들어가지 못하고 툭하면 자아비판이나 해야 하는, 남한에서는 무지무식한 형사 나부랭이들에게 얻어맞기나 하고 북한에서는 노예가 되어버린 당간부들 앞에서 자아비판이나 해야 하는 명준........
혼자서 운다는 일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젓한 몸가짐이었다.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사람은 우상 앞에서만 운다. 멍석 없이는 못 하는 지랄도 있던 것이다. 이제 명준에게 남은 우상은, 부드러운 가슴과 젖은 입술을 가진 인간의 마지막 우상이었다. 오늘 일로 하여 그는 절박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전혀 다른 짐작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짐작에서 차지할 그녀의 자리는 높은 곳 한가운데 있었다. 집이 가까운 골목에 이르렀을 때는, 이명준은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문을 열자 그녀의 얼굴이 후딱 들어왔다.
“갈까 하던 참이었어요. 인제 열 셀 동안 오시잖으면 가려고.”
명준은, 바바리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채,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심심한 걸 메우느라고 명준의 책상에 얹힌 것을 뒤적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전>. 명준은 그녀의 손에서 책을 받았다. 등을 잡고 타르르 책갈피를 넘겼다. 헌책 가게에 있는 것을 보고 사오는 날로 끝까지 읽어버린 책이다.
“재미있어?”
“그닥.......”
“앉지.”
그제야 명준은 바바리 코트를 벗어서 벽에 걸고, 자기가 먼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명준의 낌새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는지, 아무 소리도 없이 따라 앉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가슴이 비었다. 뱃속도 비었다. 시장기가 심할 때, 가슴과 배가 쓰리고 허할 때 같았다. 그러면서 먹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당장에는 단 한 술도 뜰 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슴에서 배 쪽으로 뻗치는 빈 기운이 있었다. 몸 속에 있던 내장들이 깡그리 비어버리고, 그처럼 휑뎅그런 몸뚱어리 속을 바람이 불고 지난다. 감았던 눈을 번쩍 떴을 때, 수그린 이마 바로 앞에, 그녀의 비스듬히 옆으로 뻗친 두 다리가 있었다. 아직도 해가 있어서 불을 켜지 않은 방안에는, 땅거미 질 무렵의 은근한 붉은 기운이 알릴락말락 녹아 있었다. 양말을 신지 않은, 맵시 있게 살이 붙은 두 다리는, 문득 생생했다. 명준은 가슴이 꽉 막혔다. 보고 있으면 볼수록, 그 기름한 살빛 물체는 나서 처음 보는 듯이 새로웠다. 몬색 스커트 무르팍에서부터 내민 다리는, 뚝 끊어져서 조용히 놓인 토르소였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명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팔 수만 있다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진리의 벽을 더듬은 듯이 느꼈다. 그는 손을 뻗쳐 다리를 만져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진리다. 이 매끄러운 닿음새. 따뜻함. 사랑스러운 튕김. 이것을 아닐 수 있나. 모든 광장이 빈터로 돌아가도 이 벽만은 남는다. 이 벽에 기대어 사람은, 새로운 해가 솟는 아침까지 풋잠을 잘 수 있다. 이 살아 있는 두 개의 기둥.
몸의 길은 몸이 안다. 그녀는 예사로운 애무로 아는 모양인지 하는 대로 보고만 있다.
“은혜.”
“네.”
고즈넉이 네 하는 이 짐승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밖에서 졌기 때문에, 은혜에게 이처럼 매달리는 걸까. 이긴 시간에도 남자가 이토록 사무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없을 테지. 졌을 때만 돌아와서 기대는 곳, 기대서 우는 곳, 철학을 믿었을 때, 그녀들에게 등한했었다. 사회 개조의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보람을 걸어보려던 월북 직후의 나날, 남한에 두고 온 윤애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무엇이 남았나? 나에게 남은 진리는 은혜의 몸뚱어리뿐, 길은 가까운 데 있다?
명준은 거칠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의 품속에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늘 그랬다. 이 여자가, 인민을 위한 ‘예술 일꾼’이며, 인류의 역사를 뜯어고치는 거창한 대열에 발맞춰나가는 ‘여성 투사’라? 좋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은혜다. 내 거다. 그 밖에 그녀가 되고 싶어하는 여러 것일 수 있다. 그는 그녀의 뺨에 자기의 그것을 비볐다. 도톰한 입술을 깨물어 열고 부드러운 혀를 씹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방안은 어두웠다. 그는 한 팔로 그녀를 받쳐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만져본다. 목을 더듬었다. 가슴과 허리를 짚어 내려갔다. 벅찬 깨달음을 준 다리를 쓸었다. 몸의 마디마디 그 자리를 틀림없이 알고 싶었다. 움직일 수 없이 자기에게 기대는 따뜻한 벽을 손으로 어루만져, 벽돌 하나하나를 다짐해보고 싶었다. 손이 떨어지면 그것들은 자기한테서 떠날 것만 같았다. 순례자가 일생에 몇 번이고 성지를 찾아 의심을 죽이고 믿음을 다짐하듯이, 손에 닿고 만져지는 참에만 진리는 미더웠다. 남자가 정말 믿을 수 있는 진리는, 한 여자의 몸뚱어리가 차지하는 부피쯤에 있는 것인가. 모든 우상은 보이지 않는 걸 믿지 못하는 사람의 약함 때문에 태어난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나도 ale지 못해.
"은혜, 나를 믿어?“
“믿어요.”
“내가 반동분자라두?”
“할 수 없어요.”
“당과 인민을 파는 공화국의 적이라두?”
“그럼 어떡해요?”
“은혜의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와?”
“모르겠어요.”
사랑의 말에서는, 남자가 얼간이고 여자가 재치있게 마련이었다. 남자가 고지식하고 여자가 교활하다는 말일까. 남자는 따지고 여자는 믿는다는 까닭에서일까. 명준은 윤애를 자기 가슴에 안고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남을 느꼈었다. 은혜는 윤애가 보여주던 순결 콤플렉스는 없었다. 순순히 저를 비우고 명준을 끌어들여 고스란히 탈 줄 알았다. 그런 시간이 끝나면 그녀는 명준의 머리카락을 애무했다. 가슴과 머리카락을 더듬어오는 손길에서 그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와 아들, 아득한 옛적부터의 사람끼리의 몸짓, 그녀는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저, 모스크바로 가게 될는지 모르겠어요.”
“모스크바?”
명준은 어리벙벙했다.
“네. 지금 당장이 아니구 명년 봄쯤.”
“좀 자세히 얘기해.”
“모스크바에서 예술제가 있어요. 소비에트의 각 공화국과 동구라파와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우리, 모두 나오는 거예요. 무용 쪽에서는 최승희 연구소에서 많이 나갈 거라는 얘길 들었지만, 나라를 통틀어 대표하게끔 파견단을 만들 테니깐, 국립극장 쪽에서도 얼마쯤 나갈 건 확실해요. 게다가 안나 동무는 소련 출신 아니에요? 길잡이삼아 꼭 낄 테구. 그리 되면 우리두 한몫 낄 수밖에 없잖아요? 안나 동무는 그 일로, 오늘도 소련 대사관으로 갔는데, 제가 나올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명준이 번듯이 드러누웠다. 모스크바. 은혜가 모스크바로 가? 안 된다. 그녀가 모스크바로 가면 다시는 그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 까닭도 없이, 그런 느낌이 불쑥 떠올랐다.
“얼마나 걸릴까?”
“뭐가요? 떠나기까지가?”
“아니, 거기서 머무는 사이가 말야.”
“한 서너 너덧 달?”
명준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뭐가 그리 오래 걸려?”
“예술제가 그렇게 걸리는 게 아니구요. 끝난 다음에,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한 바퀴 돌 모양이던데요. 앞서도 그랬어요. 아무튼 잘은 아무도 모르고 그럴 거라는 제 짐작이에요.”
“예술제는 확실하지?”
“확실해요. 문화선전성에 통첩이 왔다니까요.”
명준은 또 잠잠했다. 은혜는 조금 들뜬 말투로 이었다.
“기쁘지 않아요?”
“아니.”
“어느 쪽이에요? 아니라면 알 수 있어요?”
“기쁘지 않다는 쪽이야.”
“어머나!”
그녀는 놀라서 명준을 쳐다보았다.
“은혜, 가지 말아줄 수 없어?”
대답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까닭을 찾아낼 모양인지, 깜박거리지도 않고 이쪽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한참만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왜요?”
“석 달이나 은혜를 떨어져 살 수는 없어.”
그녀는 활짝 웃었다.
“어린애 같으셔.”
“난 어린애야. 당원도 아니고 인민의 일꾼도 아니야. 은혜에게 어린애 노릇하는 바보, 그게 나야.”
“왜 자꾸 당과 인민을 끌어대세요? 당이 사랑하지 말라는가요?”
“그런 게 아니구, 당보다두 나한텐 은혜가 중하다는 거야.”
“어머나, 그건 정말 부르주아적인 사상이신데?”
“그럼 은혜는, 내가 당을 위해서는 은혜를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나?”
“굳이 한쪽을 버릴 건 없잖아요?”
“버린다면?”
“생각해본 적 없어요.”
“지금 생각해.”
“네?”
그녀는 아직도, 명준의 말에서 어느 만큼한 정말과 사랑의 농담을 갈라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어. 은혜, 모스크바엔 가지 말어.”
“글세 왜 그러세요? 덮어놓고 가지 말라면......그리고 제 맘대로, 가구 안 가구 할 수도 없어요.”
“맘만 그렇게 잡으면야, 무슨 핑계로든 안 갈 수 있지 않아?”
그녀는 대놓고 언짢아 보인다.
“난 내 맘을 어떻게 옮겼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허지만, 은혜가 모스크바로 가면, 우린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같이만 생각돼. 억지 얘긴 줄 알아. 한 번만 억지를 받아줘.”
그래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은혜가 가서는 안 된다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게 아냐. 석 달이나 넉 달 갈려져 있는 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닐 테지. 허지만, 지금 내 심정으로선, 단 한 달도 갈라져 살 수 없어. 또, 아까 얘기한 대루, 이번에 은혜가 가면, 다시는 내 품에 올 수 없을 것 같아. 왜 올 수 없는지는 모르겠어. 그렇게만 될 것 같은 예감이 있어, 제발.”
명준은 오랜 옛날 이런 식으로 빌붙던 걸 생각했다. 그렇지. 인천 변두리, 갈매기가 날고 있는 바다로 트인 분지에서, 윤애의 알 수 없는 변덕을 버려달라고 빌던 자기 말투, 알몸으로 자기를 믿어달라고 빌던 말투였다. 윤애는 끝내 그녀의 벽을 허물지 않았다. 못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명준이 월북을 해낸 데는, 그녀가 안겨준 노여움과 서운함이 그 대목에서 미치고 있었던 것만은 가리울 수 없다.
여자들이란, 곧잘 미신을 섬기면서, 정작 미신일 수밖에 없는 일 앞에서는, 오히려 망설이는 것은 어찌 된 노릇일까. 은혜를 모스크바로 보내면 자기는 그만이라 싶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더욱 그랬다.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도, 한 번 말이 되어 나와버리면 허물어버릴 수 없는 담을 쌓고 만다. 지금이 그랬다.
“은혜 아무 말도 묻지 말고 내 말대로 해줘. 사랑을 위해서, 중요한 일을 농담삼아 깔아버리는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도 좋아. 나를 사랑한다는 걸 보여줘.”
“네. 가지 않을 테예요.”
흑 하면서 그녀는 두 손으로 낯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고 있자니, 마냥 흘러내린다. 명준은, 그녀 앞으로 다가가 앉아서, 낯을 가린 손목을 치웠다. 손목을 잡힌 채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흑, 하고 느끼는 그녀를 가슴에 끌어당겼다.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받아줄 사람이, 그녀 마고는 누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그를 목매게 했다.
그녀가 돌아간 후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오랫동안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른 나뭇잎이 창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메마른 삶. 이제, 오래지 않아, 그 소리도 들리지 않을 테지. 혼자 사는 살림에는 겨우살이래야 걱정할 것은 없었다. 다만, 길어지는 밤을 생각으로 채워야 할 일이 괴로웠다. 월북하고부터 그의 시간은 달음박질하듯 지나온 느낌이었다. 서울 살 때는 그리도 느리던 시간의 걸음이, 아니 그때는 시간이 없었다. 있지 않았다. 적어도 나한테는, 생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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