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죽은 도깨비를 부활시켜 내는가
저들도 사람일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눈,
같은 비,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그런 사람들일까.
오직 하나,
그런 의문만이 발생할 뿐이다.
간첩이라는 단어를 그렇게도 쉽게
직업처럼
취미처럼
오락처럼
즐기며 초조해하는 집단들을 보노라면,,,,,,,,,
그런데 이 의문은 이미 답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의문이라기보다 회의겠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한계라는 것에 대한,
저들의 초조함은 몰락을 전제하고 있다.
스스로 몰락을 예견하지 않고서야 저토록이나 미쳐버릴 수는 없는 것,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이란 이렇게도 왜소한가 하는.........
이렇게도 형편없는,
이렇게도 지저분한 인간들 앞에서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것도 미친 거다.
아마도,
니체의 처연한 농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여기서 나온 것일 게다.
그 남루한 몰골들,
모두가 알고 있는,
모두가 보고 있는
그 남루를 오직 본인만이 모르는 그런 상태,
아마도,
그 대목에서부터 자살은 유행을 타기 시작했을 거다.
하루 평균 열 명씩,
아니 수십 명씩 자살의 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는 이 조용한
오래된 유행의 기원의 단초가 거기에 있는 것일 게다,
어찌 저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랴.
어찌 저들과 같은 눈을 머리에 화관처럼 쓰랴.
어찌 저들과 같은 빗물로 내 몸을 씻으랴.
그런데 이것은,
정치라는 고깃덩어리를 독식하려는 저들의 흉계 및 전략일 수도 있다.
슬라예보 지젝의 통찰은 여기서 빛을 발휘한다.
<환상의 돌림병>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던 것.
남루도,
지저분함도 진화한다.
그들이 진화하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건 끝내,
자기에 집착하는,
작은 이익에 목을 거는
<비겁한 대중이다.>
남루에,
지저분함에 박수를 보내는 대중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리.
그렇다.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죽은 도깨비를 살려내는,
부활시켜 내는 저들의 창의력 없는
사고는 저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비겁한 대중>의 몫이라는 것을 기
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