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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섬들2/한번 더 한번만 더

새 한 마리 기르기도 힘들었던 왕

역사라는 거울로 우리는 무엇을 비춰보나

 

백제는 건국신화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의 아들 온조가 유리가 왕이 되는 데 불만을 품고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세운 나라로, 삼국 중 두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백제에 관한 자료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훨씬 적다.

  백제의 부패 관련 기록은 백제 8대 왕인 고이왕(234년~286년) 시대에 처음 나타난다. 고이왕은 왕이 되고 난 후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하는 관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것의 세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한다'고 하며 매우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도록 했다. 이는 뇌물수수죄에 대한 백제 최초의 벌칙 조항 기록이다. 고이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제도를 정비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이왕 시절 백제는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좌평제를 완성했다. 행정과 법을 담당하는 좌평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이왕 때 백제가 비교적 완성된 형태의 통치체체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부패방지 체제와 직접 관련 있지는 않지만 백제는 통치의 합법성과 정당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한 시도하기도 했다. 이는 백제왕조에 대한 정당화 작업이기도 하지만, 유교적 가치를 기초로 왕들의 공과를 평가하고 도덕적 교윤을 얻으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흔히 역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왕권 자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함인데, 이것은 적어도 백제 안에 통치체제를 평가하거나 감사하는 직책이나 기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건국 초기부터 백제를 괴롭혀온 것은 왕과 귀족간의 갈등이었다.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왕들은 통치체제를 개편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수도를 몇 차례나 옮기기도 했다. 귀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왕들은 수시로 전쟁를 벌이거나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곤 했다.

  백제 16대왕인 진사왕(385년~392년)은 아주 대표적 사례이다. 진사왕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끊임없이 공격하여 일부 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재위 7년인 391년, 전쟁을 치루는 한편 궁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부속시설들을 호화롭게 꾸미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들었다. 전쟁과 호화로운 생활로 당연히 민심은 떠나고 국력은 약해졌다. 급기야 진사왕 8년에 고구려 광개토왕 4만 군대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는다. 광개토왕은 끊임없이 국력을 낭비해온 백제를 상대로 한강 북쪽의 성 열개와 서해 요충지인 관미성을 손쉽게 점령한다.

  고구려 첩자인 승려 도림의 꾀에 빠져 백성들을 수탈하여 궁궐을 증축하고 아버지 비류왕의 묘지를 치장한 개로왕은 결국 장수왕의 공격으로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는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된다. 무왕과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백제왕들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끊임없이 벌였고, 이는 백제의 힘을 약화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백제왕들의 이러한 부패와 횡포에 맞선 신하들의 간쟁이 없지는 않았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왕의 잘못을 간하는 신하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성왕 22년 (500년) 궁 동쪽에 임류각를 세우는데 높이가 5장이었고 연못을 파고 기이한 새을 길러서 이를 심려하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듣지 아니했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궁문을 닫아버렸다.'
  
  동성왕은 신하들의 반란으로 살해당하기는 했지만 재위 기간이 22년으로 기존의 불안하던 왕권을 안정시키고중앙집권을 강화한 왕이었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왕에게 '새 한마리'로 간언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는 것을 뜻한다. 또 이런 간언들을 왕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다시 간하는 자 있을까 하여 궁문을 닫아버렸다"는 대목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백제왕들이 끊임없이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도 이렇듯 왕권을 견제하고 간언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료출처 - 걸리버프로젝트, 그 완성을 위하여    김정수 지음    도서출판 시지프스>